
10
일본헌병대는 광을 찾지는 못했다. 워낙 어수룩했던 곳이라 그들의 칼끝이 지나쳤다. 하지만 위태위태했다. 언젠가 그들의 칼끝이 어수룩한 그곳의 심장을 찌를게 뻔했다.
김시원은 아내의 장례식 때 당한 치욕도 못견딜 판에, 또 다시 자신의 가문을 쑥대밭으로 만든 그들에 대한 살기(殺氣)로 치를 떨었다. 자신의 죽은 아내를 꺼내어 시신마저 능욕한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이 모든 사단이 덕길과 미옥이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두 노비 년놈들을 찢어죽여도 시원치않을 정도였다.
"너는 왜 서울로 올라가지 않는거냐?"
김시원은 미옥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성준은 순간 당황했다.
"집안이 어수선합니다. 정리가 되면 올라가겠습니다."
"금방 정리될 일이 아니다. 그만 올라가라."
김시원은 정없이 단호했다.
"아버님 혼자서..."
김시원은 성준의 말을 툭 잘라냈다.
"그 패물은 잘 전달했냐?"
"네에?"
성준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입안에 침이 말랐다.
"권기주 선생을 통해 독립군 자금으로 들어간거 아니냐?"
성준은 온몸이 땀으로 젖어겄다.
"네, 네 맞습니다. 아버님."
"일전에 권기주 선생한테 들은 적이 있다. 앞으로 몰래 가져가지 말고 내게 말해라."
"네, 아버님."
"나가봐."
김시원은 나갈 채비를 하였다.
"아버님..."
김시원은 성준을 흘깃 보았다. 마땅치않은 눈길이었다.
"구국을 위해선 큰 돈을 아끼지 않으신 분이 왜 노비들에게는..."
성준은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말이 딸렸다.
"구국과 노비 문제는 그 격이 다르다. 논할 가치가 없는 문제다. 그만 나가라"
김시원은 성준을 내쳤다.
"아버님.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살아있는 인간입니다."
성준은 아버지의 격(格)과 싸우고 싶었다.
"살아있다고 다 인간 아니다. 언젠가 인간이었던 적도 있었겠지."
김시원은 목소리가 뒤틀려갔다.
"허나, 그들은 짐승이 된게야. 일하는 짐승.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김시원은 선전포고를 외치는 듯 했다.
"그렇다면 왜 일본으로부터 우리나라를 구하려 하십니까? 일본에게 우리나라는 노비이자 짐승입니다."
성준은 선전포고에 기꺼이 맞서고 있었다.
"우리는 노비가 아니니까. 짐승이 아니니까."
김시원은 으르렁거렸다. 성준도 이빨을 드러냈다.
"그럼, 우리는 언제부터 노비가 되었습니까? 언제부터 짐승이 되었습니까? 바로 일본이 우리를 침탈했을 때부터 노비가 된겁니다."
성준을 노려보는 김시원의 눈빛은 스스로의 격(格)을 잃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그들을 침탈했을 때부터 그들은 노비가 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노비가 아니었던 겁니다."
김시원은 버럭했다.
"난 가고자 하는 놈들의 노비문서를 태워주었고 놈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성준도 버럭했다.
"그건 아버님의 체면때문이십니다. 아버님은 그저 존경받는 유학자이시고 싶으셨던 겁니다. 평판을 중요하게 여기신겁니다. 아닙니까?"
"이놈이 감히?"
김시원은 달리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난 그들을 강제로 잡아두지 않았다."
김시원은 아직도 존경받는 유학자이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자들을 받으셨습니다."
이번엔 성준의 목소리가 뒤틀렸다.
"그것이 뭐가 문제냐? 내게 돌아온 자들을 받아주었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었다. 그래서?"
김시원은 장차 스스로의 몰락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님은 그들의 일손이 필요하셨던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노비로 받아들이신거죠. 아버님, 아버님은 그들을 인간으로 받으신게 아닙니다."
김시원을 노려보는 성준의 눈빛은 스스로의 격(格)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원래부터 노비이고 지금도 노비이고 앞으로도 노비일 것이다."
성준은 긴 한숨을 쉬었다. 탄식이었다. 그때 얼례가 들어섰다.
"도련님, 서울에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성준은 얼례로부터 편지를 건네받았다.
"누구냐? 권기주 선생이냐?"
성준은 편지를 예의없이 찢었다. 어차피 아버지에 대한 예의(禮儀)를 버리고 싶었다.
권기주 선생은 성준에게 빨리 오라는 전갈을 보냈다.
"어서 올라가라. 공부에 힘써라. 너의 의무다."
성준은 대답하지 않고 물러났다. 이제 예의를 버렸다.
미옥은 동굴에서 달리 할 것이 없었다. 몸은 나아졌지만 무료하기 짝이없었다. 그녀는 동굴의 수많은 항아리를 죄다 열어보았다. 쌀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준은 들뜬 발걸음으로 들어섰다.
"가만있지 못하고 뭐하는거냐? 아직 더 쉬어야 한다."
"소주를 만들겁니다. 도련님."
"소주?"
"네, 돌아가신 마님이 하시는 모습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제가 해보려 합니다."
미옥의 자못 진지함에 성준은 픽 웃었다.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나중에 아씨가 하셔야 되긴 합니다. 가문의 내력(來歷)을 함부로 욕되게 할 수 없으니..."
성준이 미옥의 손을 든든히 잡았다.
"네가 아씨가 될거다. 네가 소주를 만들어라."
덕길은 주차사령부(駐箚司令部) 앞에 서있었다.
소설가 하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