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한국 수영 간판스타인 ‘마린보이’ 박태환 선수가 세계반도핑기구(WADA) 도핑 심사에서 양성 반응을 받았다는 결과가 발표돼 충격을 줬다. 그의 검사 시료에서 금지약물로 규정된 테스토스테론이 검출됐다는 이유였다. 이후 2개월간 논쟁 끝에 3월 23일, 세계수영연맹은 박 선수에게 책임을 물어 18개월간 자격정지 처분과 함께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따낸 6개 메달도 모두 박탈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박 선수가 투여받은 약물은 바이엘에서 출시한 ‘네비도’다. 네비도 주성분은 포장 전면에 적혀있는 대로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이다. 테스토스테론은 스테로이드 호르몬 일종으로 흔히 ‘남자다움’이라는 신체적 특징을 만드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남성호르몬이라고도 불린다.
테스토스테론은 남성이 남성다운 몸과 남성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물질이다. 따라서 선천적인 이유로 고환이 없거나 위축된 경우, 테스토스테론이 분비되지 않기 때문에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남성으로써의 정체성을 갖고 살기가 어려워진다. 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아나볼릭-안드로게닌 스테로이드(AAS)다. AAS에는 합성 테스토스테론 외에도 스타노조롤, 난드롤론과 같은 비슷한 구조를 가진 다른 형제들도 포함된다.
AAS를 주입받은 이들의 몸은 근육이 늘고 체모가 자라고 성대가 굵어지면서 남성답게 변해간다. 특히나 AAS는 체내 단백 동화 현상을 활성화시켜 근육 양과 강도를 늘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AAS에 눈독을 들이는 새로운 부류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치열한 몸의 격전장에서 경쟁하는 스포츠 선수다.
직업 스포츠 선수는 신체가 가진 한계점을 높이기 위해 약물을 사용한 것은 꽤 오래전부터 시작된 악습이었다. 이미 고대 그리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경기력 향상을 위해 환각 성분이 든 무화과를 먹었다거나, 로마시대의 검투사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경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흥분제를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경쟁에서 이기려는 욕구가 과학기술과 만나자 파장은 훨씬 증폭됐다. 선수들은 환각성 곰팡이나 코카나무 잎, 카페인에 더해 암페타민과 같은 강력한 각성제와 에페드린, 각종 중추신경 자극제와 함께 테스토스테론을 포함한 AAS에까지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암암리에 남용되던 약물에 본격적인 재제가 가해지기 시작한 건 1960년대부터였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덴마크 사이클 선수가 흥분제 과다복용 부작용으로 경기 도중 급사하는 사고가 일어난 뒤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스포츠위원회가 공식적인 ‘반도핑 규정’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한 번 뿌리내린 약물의 그늘은 쉽게 제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999년 강력한 제제수단을 가진 세계반도핑기구가 자리잡은 이후 집단적 광기는 사그라졌지만, 여전히 선수들은 은밀히 금단의 열매에 손을 내밀곤 한다.
많은 이들이 반도핑 규정에 의해 스포츠 선수 약물 복용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것이 스포츠 정신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세계반도핑기구가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것은 스포츠 정신이 아니라 선수들 그 자체다. 젊은 유망주가 한때의 유혹에 못 이겨 금지약물에 손을 댔다가 폐인이 되거나 목숨까지 잃는 경우를 너무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추상같이 엄격한 도핑 규정은 미래가 창창한 젊은 선수가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생 자체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거칠지만 진심어린 보호구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박태환 선수 도핑 사건은 어쩌면 일어났을지 모르는 미래의 더 큰 사건에 대한 경고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은희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