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이라는 책에는 `어떻게 독서할 것인가`라는 목록이 나온다.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 소개하자면 이런 내용이다.
`평소에 독서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자기만의 세계에 감금되어 있으며, 그의 생활은 틀에 박힌 상투적인 것이다. 그 사람이 교제하고 대화하는 것은 극소소의 친구나 지기뿐이며, 그 사람이 보고 있는 것은 대부분 신변에 일어나는 사소한 일에 불과할 뿐이다. 그 감금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책 읽기가 어떤 종류의 감금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수 있다는 얘기인데, 그저 머리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각성한다.
어느 순간 일상의 순간들이 권태로워 지는 시기가 있다. 모든 게 새로웠던 시절에는 호기심만으로 견딜만 헀으나, 나이라는 연륜이 쌓이면서 대중 문화의 기반이 상투의 감금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이미 여러 번 겪어본 상황은 더 이상 새로운 흥미를 유발하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책 읽기는 인내와의 싸움이 아니라 인류가 고안해낸 훌륭한 엔터테인먼트 중의 하나일 거라 생각한다. 어렵거나 의미 없어 내 던지고 싶은 책이 많을 만큼 아직도 쉽게 정복할 수 없는 분야이기도 하지만, 몰랐던 분야의 지식이나 생에 대한 새로운 관조법을 발견하고, 무료를 덜어준다는 점에서 무한 긍정을 갖고 있다.
뜬금없이 임어당의 독서론을 꺼낸 것은 작가 김도언이 최근 펴낸 `소설가의 변명`(가쎄)이라는 산문집에 대한 서평을 위해서다.
이미 소설가이면서 시인으로, 언론 칼럼니스트로 자리를 잡고 있기에 그의 글에 대한 품평이 가당찮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애정을 지닌 호사가로서 작가인 그를 평한다고 한다면, 그나마 양해를 얻을 수 있을 터이다.
그는 작가이면서 엄청난 다독가이다. 이 책은 독서를 통해 구축된, 작가 이전의 한 자연인의 사유가 어떤 독창성을 유지하고 있는 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미 시중에 나온 소설이나 산문집을 읽고, 또 SNS를 통해 지속적으로 그의 글을 접해왔다. 그리고 이번에 출간된 `소설가의 변명`이라는 책을 `소가 되새김질 하듯` 찬찬히 읽어 내렸다.
그의 글에 대한 느낌은 특급호텔 일류 요리사의 잘 벼려 낸 칼날과 같다는 것이다. 독특한 사유와 시니컬한 위트, 부조리, 허무, 그리고 휴머니즘이 제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 조화롭게 버무려져 있다. 산문집을 통해 이렇게 여러 맛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것은 희귀한 경험이었다. 능수능란하게 글을 요리하는 그의 칼질 솜씨가 없었다면 아마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범속한 일상에서 쉽게 알아챌 수 없는 삶의 이면을 포착하는 데 천부적인(또는 동물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다. 인생의 생물학적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그의 날카로운 눈은 부럽기만 하다.
`...나는 인간의 악의, 악행, 도덕적 타락에 대한 이해가 선의에 대한 이해보다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훨씬 수월하고 유효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비관주의자다운 것이겠지만 선의는 보통 위장되거나 왜곡되어 있기 쉽지만 악의나 악행은 있는 그대로의 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비관주의자, 24p)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속에 자주 나오는 허름한 바와 그 안에서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는 여자들과 미국 맥주와 담배와 비스킷의 이름들은 왜 그렇게 음울한 뉘앙스를 자아내는지, 나는 사실, 삶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들이 아주 조금씩 조금씩 그 사실을 아껴가면서 노출시키는 것이 오늘날 문학의 조건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문학의 조건, 129p)
그의 산문집에서 어떤 경우에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에서 맛본 `영감`이 떠오르고,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서 느꼈던 진한 허무가 생각나고,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읽어낸 시니컬한 유머와 세상에 대한 조롱을 읽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산문집에서 무엇보다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이웃에 대한 따뜻한 연민의 정이다.
`어쨌거나 그(왜소증 장애인)를 만나는 아침이면, 무언가 죄스럽고 민망한 기분이 감정의 골을 가득 메운다. 이 알량한 양심과 윤리로 삶에 드리운 겨울의 강을 건너가고 있다. 오늘 하루 그에게 영광있기를. 내 마음속 연민과 안도 사이에 놓인 비겁의 징검다리를 본다.`(238p)
`가난한 집의 아이는 설탕과 짠 음식을 좋아한다. 위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른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아이에게 설탕과 짠 음식을 좋아하는 식성을 물려준다. 가난을 대물림할 자신의 아이를 위로해야 하기 때문이다.`(치사한 섭생, 176p)
*1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도언은 지금까지 소설집 `철제계단이 있는 천변풍경`(자음과모음) `악취미들`(문학동네) `랑의 사태`(문학과 지성사)와 장편소설 `이토록 사소한 멜랑꼴리`(민음사) `꺼져라 비둘기`(문학과지성사), 경장편소설 `미치지 않고서야`를 펴냈다. 2012년 계간 `시인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시작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어느 시기에 ‘우리 시대 주목할 만한 작가’라는 코너가 생긴다면 나는 작가 김도언을 천거하기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나성률 기자 nasy23@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