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 도 넘은 블랙컨슈머...엄연한 `범죄`

#1. 휴대전화 이용 고객이 갑자기 제품에서 불이 났다며 환불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국립과학연구소에 의뢰해 재현 실험을 한 결과, 전자레인지를 통한 발화로 드러났다. 좀 더 확인해 보니 민원을 넣었던 고객은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명의로 휴대폰 교환, 환불을 이미 7~8차례나 요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슈분석] 도 넘은 블랙컨슈머...엄연한 `범죄`

#2. 한 자동차 판매업체는 7개월간 한 명의 고객으로부터 매일 수차례 괴롭힘을 당했다. 고객은 소음을 비롯한 여러 불만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객 콜센터에 민원을 넣었다. 정비 접수할 때마다 9~10가지 항목에서 이상이 있다고 주장했다. 정상이라는 판정이 나왔고 새 부품을 교환해줬지만 오히려 더 자동차 성능이 나빠졌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모욕적 언사와 욕설을 섞어가며 제기했고 하루 기본 한 시간 이상 불만을 제기했다. 이 사람은 개인 블로거,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에 이런 사례를 자랑삼아 게재하기도 했다.

#3. 자신을 사진작가라고 밝힌 한 사람은 구매한 PC에 문제가 생겨 이전 작품 모두가 훼손됐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이런저런 근거를 달아 억대 피해 보상을 요구했다. PC 제조사는 제품 교체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결국 문제가 더 커질 것을 우려해 수천만원을 물어주는 선에서 문제를 종결했다.

#4. 스마트폰 수리기사가 직접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스마트폰은 세 번 이상 같은 증세로 고장이 나면 환불이 가능하다는 점을 노렸다. 한 수리 기사는 스마트폰에 일부러 고장을 내고 여러 서비스 센터를 돌며 환불을 요구했다. 일부러 회로기판을 고장 냈고, 스마트폰을 뜨거운 햇빛 아래 있는 차 안에 넣은 다음 달궈진 스마트폰을 곧바로 서비스 센터로 가져가기도 했다. 이들은 스마트폰 대리점을 차려 놓고 지인 명의로 개통해 통신사에서 대당 40만원 정도 수당을 받아낸 뒤, 스마트폰은 환불해 버리는 수법으로 138차례에 걸쳐 1억원 정도를 챙긴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블랙컨슈머’가 활개를 치고 있다. 제품에 불만이 있다며 매장을 찾아와 소리를 지르는 일은 이미 고전적 수법이다. 단순 변심을 제조사나 유통사 책임으로 전가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조직적으로 대응법을 연구하는 사례까지 나오고 있다.

블랙컨슈머는 사실상 모든 제조사, 유통업체에 골칫거리다. 대기업은 물론이고 매출액이 미미한 중소기업까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블랙컨슈머 문제를 겪고 있다.

이전 코미디 프로그램 개그콘서트 ‘정 여사’ 코너에 블랙컨슈머 모녀가 등장했다. 시청자 대부분은 웃고 넘겼겠지만 유통업계는 실제 쇼핑 현장에서는 이보다 더한 사례가 넘쳐난다고 지적한다.

물론 잘못된 제품의 교환과 환불을 요구하는 것과 블랙컨슈머는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 블랙컨슈머는 대부분 반복적으로 문제를 일으킨다. 동호회나 소비자모임을 빙자해 그들만의 성공사례를 공유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주요 유통회사는 자체 ‘블랙컨슈머’ 리스트를 작성해 보유하기도 한다.

제조사와 유통사는 대부분 이 같은 소비자 민원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잘잘못을 떠나 제품과 서비스에 하자가 있었던 것으로 비쳐지는 것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 가전유통전문점 관계자는 “대부분 경영진과 점장은 부당함을 알면서도 시끄럽기보다는 금전 보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쪽으로 처리방향을 잡는다”고 말했다.

대한상공회의소 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 가운데 83.4%가 블랙컨슈머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적극적 대응으로 문제를 해결했다는 응답은 전체 14.3%에 불과했다. 무려 83.4%는 별다른 대처를 못 하고 ‘검은 요구’를 들어줬다고 답했다. 법률 지식이 부족하고 여러 경험이 없는 중소·벤처기업은 대기업에 비해 대응이 더 서툴 수밖에 없다.

대형 점포는 점포마다 연간 수천만원에서 억대가 넘는 블랙컨슈머 대응 비용이 발생한다. ‘새 밥솥을 샀는데 밥맛이 이전만 못하다’거나 ‘구매한 선풍기를 조립하다 손을 베었으니 피해를 보상하라’는 등 다양한 불만까지 접수된다.

블랙컨슈머는 제조·유통업체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엄연한 범죄행위다. 제조사나 유통사에 직간접으로 금전적 손실을 끼친다. 1년 이상 문제를 끌며 기업이 제품 개발이나 마케팅에 쏟아야 할 기업 역량을 다른 쪽으로 분산시키기도 한다. 고성이나 반복된 불만에 대응하면서 기업 담당자가 부담해야 하는 감성적 피해도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블랙컨슈머는 다른 건전한 소비자의 효용을 갈취한다. 여러 기업이 블랙컨슈머에 대비해 대손충당금을 쌓고 있다. 이는 제품과 서비스에 포함돼 전체적인 가격을 끌어올린다. 선의의 소비자에게는 분명한 피해다.

김승규기자 seu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