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훈민정음 창제와 천문도

[칼럼] 훈민정음 창제와 천문도

1.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이야기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과학적인 문자라고 한다.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떴기 때문에 과학적인 글자이며, 배우기가 쉬워서 우수한 글자라고 한다. 그러나 한글은 외국인에게 배우기 쉬운 글자가 아니다. 소리 나는 대로 적는 글자도 아니며, 포토그래픽의 측면에서 보면 변별력이 좋은 글자도 아니다. 글자의 공간 처리가 미흡하여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운 글자꼴만은 아니다. 한 예로 러시아 극동대학의 한국어학과 졸업생 탈락자가 절반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언어학자 에칼트 박사(P.Andre Eckardt) 는 그 나라의 문자로 그 민족의 문화를 측정하기로 한다면 한글이라는 문자를 사용하고 있는 한국 민족이야말로 단연코 세계 최고의 문화민족이라고 하였다. 프랑스의 동양학 연구소 파브르 교수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뿐 아니라 이러한 일을 해낸 한국 사람의 의식구조를 한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지구상에 발명자가 분명한 글자는 오직 한글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세종이 과연 어떠한 이론을 창제의 바탕으로 삼았기에 세계의 석학들로부터 지구상에서 둘도 없는 가장 훌륭한 문자라고 찬사를 받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한글이 우리의 동양천문도에 이론적인 바탕을 두고 창제한, 자연에서 찾아낸 문자이기 때문이다

2. 훈민정음 창제의 주체

훈민정음 창제는 누가 했을까? 세종대왕과 집현전의 공동 연구인가 세종대왕의 연구 결과물인가. 세종 때 만든 해시계를 비롯한 30여종의 발명품에는 하나같이 그것을 제작한 실무자의 이름과 연유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훈민정음만 유일하게 실무자의 이름이 없이 세종 혼자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이 눈병이 나서 청주의 냉천으로 요양을 떠나면서도 훈민정음 자료를 한 보따리 챙겨 떠난 사실을 보더라도 얼마나 한글 창제에 몰두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연구물이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애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 훈민정음 창제가 세종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바로 <세종실록> 103권과 <훈민정음 해례본> 61쪽의 정인지 서문에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했다(자방고전字倣古篆)’라는 문구 때문이다. 그동안 ‘고전’을 한자의 옛 서체나 범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필자는 여기에 나오는 ‘전문篆文’이나 ‘고전古篆’이나 최만리가 말한 ‘전자篆字’가 모두 단군 때의 ‘가림토’를 일컫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토착吐着’이라는 문구 때문이다.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 유사에 “세종이 방언이 문자와 서로 통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을 여러 대군에게 풀어보게 하였으나 아무도 풀지 못하였다. 그래서 출가한 정의공주에게 보냈는데 곧 풀어 바쳤다. 이에 세종이 크게 기뻐하면서 칭찬하고 큰 상을 내렸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집현전학사들의 창제설도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신숙주가 귀양 와 있는 언어학자 황찬을 만나러 요동을 왕복한 것도 그 당시의 국제 공용어인 한자발음을 정확히 알기 위한 목적이었지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자문을 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숙주가 황찬을 처음 만난 것은 훈민정음이 다 만들어진 세종 25년인 1443년 계해년 겨울(癸亥冬)보다 1년 2개월 후인 1445년 1월 세종 27년이었기 때문이다. 또 신숙주가 집현전 학사로 들어온 시기가 그가 25세 때인 세종 23년(1441년)이었고 세종 25년(1443년) 2월에 27세의 나이로 일본 통신사 변효문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곧 바로 8개월 동안 일본을 다녀오는 일 등으로 하여 그 시기에 훈민정음 제작에 참여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성삼문도 훈민정음이 반포된 1446년 이후인 1447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 학사가 되었다. 따라서 신숙주는 세종의 명을 받아 이미 만들어진 한글로 언문 서적을 편찬하는 일에 참여했던 것일 뿐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전문지식은 없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동국정운을 편찬할 때 세종이 일일이 신숙주의 번역 내용을 꼼꼼히 검토한 후 통과가 되어야 다음 내용을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또 최만리가 그 당시 집현전의 두 번째 서열인 부제학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집현전학사들과 집단으로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은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창제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같이 만들었다면 집현전의 부제학이라는 지위에 있던 사람이 뚱딴지 같이 상소를 올릴 이유가 없다. 또 성현의 용재총화에 “세종이 언문청을 설치하고 신숙주와 성삼문 등에게 명하여 언문을 만들게 하였다.”라는 내용도 또한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성현은 세종 21년에 태어난 사람으로 그가 4살 때 훈민정음이 창제되었기 때문에 창제과정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언문청도 훈민정음을 만든 후 글자를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지 훈민정음 창제를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니었다.

세종 25년 이전까지의 어떤 기록에도 집현전 학사들의 협력을 얻었다는 기록이 없다. 최만리가 “언문이 조금도 이익 됨이 없는데 세자가 이 일에 정신을 쏟으면서 시간을 보내니 이는 시급히 닦아야 할 학문에 손해가 심하다.” 라고 불평한 내용이나 “그 일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 것이라고 정사는 행정부에 다 맡겨놓고 눈병이 나서 요양을 하러 떠나는 마당에 그곳까지 연구 자료를 챙겨간다는 말인가!”라고 한 기록으로 보아 아들 문종과 딸 정의공주 등을 조교로 삼아 세종 홀로 창제에 몰두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3.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에 반영한 동양 철학은 무엇인가

우리의 하늘지도인 천문도는 돌에 새긴 별지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외에 <28수 천문도>가 있다. 그것은 천구天球를 동, 서, 남, 북, 4방으로 나누고 각각 7별자리씩 모두 28별자리를 배당하고 거기에 천간과 지지를 배치한 천문도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이 천문 관측 및 연구에 몰두했다는 여러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만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15년(1433년)에는 자신이 직접 28수의 거리와 도수, 12궁에 드나드는 별의 도수를 일일이 측후하여 이순지에게 명하여 그것을 석판에 새기게 하고 천문 역법에 대한 책을 편찬케 하였다.

세종실록 15년조에 의하면 정초, 박연, 김진 등이 새로 만든 혼천의를 바쳤다. 세자(문종)가 간의대에 나아가 정초, 이천, 정인지, 김빈 등과 함께 간의와 혼천의 제도를 강문하였다. 김빈과 내시 최습에게 명하여 간의대에서 숙직하면서 해와 달과 별들을 관찰하여 그 문제점을 파악하게 하였다. 당시 숙직 때문에 고생하는 김빈에게는 옷까지 하사하였다.

세종16년(1434년)에는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높이 31자(6.3m), 길이 47자(9.1m), 너비 32자(6.6m)의 돌로 쌓은 관측대를 만들었다. 또 그곳에 1년 만에 간의를 준공하였다.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 혼상, 규표와 방위 지정표인 정방안 등이 설치되었다. 간의대 서쪽에 설치된 거대한 규표는 동표의 높이가 40자(8.3m)였다. 청석으로 만든 규의 표면에는 장, 척, 촌, 푼의 눈금을 매겨 한낮에 동표의 그림자 길이를 측정하여 24절기를 확정하는 데 사용하였다. 앙부일구를 처음으로 혜정교와 종묘앞에 설치하였다. 이것은 원나라 사람 곽수경이 세운 관성대觀星臺 이후 동양에서 가장 큰 간의대였다. 대 간의대는 하늘을 원으로 하여 365도 1/4의 눈금이 새겨진 적도환이 있었다. 그 안쪽에 12시 100각의 눈금이 새겨진 백각환이 있고 중심에 사유환이 있어 천체의 변화 위치를 관측하였다. 이 간의대는 세종 20년(1438년)부터 서운관書雲觀이 주관하여 매일 밤 5명의 관리가 교대로 관측에 임하게 하여 실질적인 기능을 다하였다.

그리고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서운관은 세종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편하였다. “관상감은 천문, 지리, 역수曆數에 관한 업무를 맡아본 관아로써 측우기, 물시계, 해시계의 발명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천문과 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한 세종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관상감의 관원을 30여명에서 80여명으로 확대하였다.” 당시 명나라 천문 기관인 흠전감欽典監의 인원이 11명이었던 점을 보면 세종이 얼마나 천문에 심혈을 쏟았는지 알 수 있다.

또 세종 16년(1434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세종20년(1438년)에 준공된 흠경각欽敬閣은 경복궁 강녕전 곁에 있었다. 12지신상을 만들어 때마다 시각을 알렸다. 세종 19년에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는 관측기를 완성하여 사용하였다. “평양에 있었던 고구려 석각 천문도가 전란중에 대동강에 빠뜨려 잃어버리고 없었는데 태조 등극 초기에 그 탁본을 바친 자가 있어서 전하께서 보물처럼 중하게 받았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태조 때부터 천문도제작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음을 볼 수 있다.

세종이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를 물리치고 장영실을 중용하여 ‘혼천의’ ‘관천대’ ‘일성정시의’ 등 여러 가지 새로운 천문기기를 제작하게 한 것은 천문연구에 심혈을 기울였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이러한 천문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으로 미루어 볼 때 훈민정음 창제원리와 천문 이론이 서로 연관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것이다. “훈민정음 지으심이 꾀와 재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소리에 맞게 그 이치를 다하였을 뿐이다. 그 이치가 둘이 아니니 어찌 천지귀신과 그 쓰임을 다하지 않겠는가!”라고 한 내용에서 ‘천지귀신’이라는 말은 ’자연’ 또는 ‘천문’의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전통 문화와 영혼관은 천문을 떠나서 이야기할 수 없다. 궁궐의 건물 이름도 천문과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창덕궁 내의 정자와 전각의 이름도 28수의 이름을 따랐다. 돌아가신 선대왕들의 어진御眞을 모신 건물을 선원전璿源殿이라고 하고 왕실의 족보를 선원록璿源錄이라고 하는데, 선원璿源은 우리 민족의 별자리인 북극성을 뜻한다. 고구려 백제 등의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사신도四神圖도 28수천문도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우리 민족은 죽음이 곧 영혼의 본 고향인 우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망자亡者를 죽음을 관장하는 별인 북두칠성을 새긴 판에 뉘여 묻었으며, 무덤 내부의 천정을 우주로 보고 별자리로 장식하였다. 이는 전국의 고인돌 덮개에 북두칠성을 비롯한 28별자리가 발견되는 것을 보아도 선사시대부터 내려오는 우리민족의 전통문화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추분, 동지 ,춘분. 하지 등 우주변화의 원리에 이론적인 바탕을 두고 창제하였기 때문에 한글이 모두 28자가 된 것이다. 세종실록 12년 10월 23일조의 기록에 의하면 정인지가 부제학으로 있던 시절, <계몽산啓蒙算>이란 수학책으로 곱셈, 나눗셈, 분수, 원주율, 제곱근 등의 계산법을 공부하고 있는 세종을 만날 수 있다. 수학은 천문학과 과학의 기본이다. 세종이 문자 창제를 함에 있어서 수와 방위를 중요시하는 천문 이론에 바탕을 둔 것도 문자가 단순히 언어를 표현하는 도구로만 보지 않고 천문과 우주 변화의 작용까지 읽을 수 있는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4. 동양 철학까지 수용한 한글

이 글은 기존의 훈민정음이 발음기관을 기초로 만든 과학적인 측면 외에 동양 철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설명해보았다. 특히 훈민정음이 모두 28자로 만들어진 이유는 동양천문도인 <28수 천문도>에 이론 적인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천문 사상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7개의 별자리가 있고 28개의 별자리는 하늘을 의미한다. 세종대왕은 명나라의 하늘에서 벗어나 ‘조선의 하늘’을 가지고자 했던 자주정신 정립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의 문자’인 훈민정음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쓰는 한글에는 하늘의 이치(천문)와 사람의 이치(천지인)가 그대로 녹아있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필자소개/반재원 소장

중앙대 사회개발 대학원을 졸업하고 훈민정음 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과학적인 훈민정음의 창제원리를 연구하여 소실된 4자의 재사용을 통해 세계적인 공용문자로써의 한글보급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글창제원리와 옛글자 살려쓰기’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