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석태의 Healing & Success 나의 스승 어머니

하석태의 Healing & Success 나의 스승 어머니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오동동 술타령>이라는 노래로 유명한 마산 오동동 술집동네 한복판 뒷골목이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이 차가 11살이었다. 어린 시절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거의 매일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었고, 쌀 뒤주에 쌀이 떨어져도 걱정 한번 하지 않는 무책임한 분이셨다.

깡촌에서 자라고 학교 문턱에는 가본 적도 없는 어머니는 스무 살 때 선보러 온 아버지를 멀리서 얼굴 한번 보고 결혼식을 올렸다. 나이 많은 신랑과 결혼하면 사랑 받는다는 어르신들의 꾀임에 속아 시집을 온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아버지는 좌익분자라는 죄목으로 폐인처럼 살던 형편이었다.

시집이라고 와보니,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힌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었다. 술꾼에 성격까지 괴팍한 남편, 여섯이나 되는 시동생, 시부모까지, 어린 신부가 졸지에 짊어져야 할 짐은 태산처럼 무거웠다.

어머니의 고생은 감히 내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대가족의 뒷바라지를 하고 생계를 이으려면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어머니는 낮에는 포장마차를 하고, 밤에는 술집 아가씨들의 빨랫감을 가져다가 손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나의 뇌리에 남아있는 핏빛추억이 있다.

찬바람이 들이치던 어느 겨울날 오밤중이었다. 문득 잠에서 깨어보니 어머니가 여느 때처럼 희미한 전등불 밑 한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빨래를 하고 계셨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날따라 무척 고단하셨는지 꾸벅꾸벅 좋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살며시 다가가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는 순간, 나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빨랫대야 안이 시뻘건 색깔로 변해 있는 것이 아닌가? 부르트다 못해 쩍쩍 갈라진 어머니의 손에서 피가 흘러나와 빨래 안은 온통 선홍색 피로 가득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집 뒤 모퉁이 숨어서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지긋지긋하고 자존심 상하는 가난을 내 자식에게는 절대로 물려주지 않겠노라고.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어머니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계신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잠시도 쉬는 법이 없었고 항상 무언가를 분주히 하고 계셨다. 어머니의 끝없는 희생정신과 강인함, 성실함, 정직함은 내 일생의 큰 스승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방황도 하고 고비도 숱하게 넘겼지만 그때마다 나를 지탱해 주고 이끌어준 것은 어머니였다. 간혹 이기심이 발동해서 상대를 짓밟고 일어서고 싶을 때 나를 만류한 것은 어머니의 희생정신과 정직함이었고, 포기하고 싶거나 나태해질 때 나를 꾸짖어 준 것도 어머니의 성실함이었다. 눈물이 펑펑 나도록 힘이 들 때 나를 다잡아준 것도 어머니의 강인함이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그 어떤 선생님보다도 내게 큰 가르침을 주셨다. 어머니는 내게 공부하라는 말씀 한번 하신 적이 없지만 당신의 삶과 행동 자체가 내게는 학교에서 절대 배울 수 없는 귀중한 공부였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어머니를 실망시키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어머니가 그러셨듯이 나 역시 자녀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는다.

단 하나, 본인의 인생은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주지시킨다. 입시 경쟁이 치열한 서울 강남에 살면서도 공부를 강요한 적이 한번도 없고, 매를 들어본 적도 없다. 내 삶 자체가 가장 좋은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잔소리보다는 어머니가 내게 몸소 가르치신 성실함과 강인함, 정직함을 물려주고 싶다.

내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가장 좋은 가르침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인생의 성공 역시 이해가 아니라 실천임을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하석태. hstgroupceo@gmail.com

HST group(주) 대표이사. 영업교육 전문가.

저서-‘딱! 100일만 미쳐라(21세기북스, 201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