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동의 사이버세상]<1>더 ‘진짜’ 같은 가상현실](https://img.etnews.com/photonews/1507/704813_20150714143039_319_0001.jpg)
사이버공간은 가상현실(VR)을 기반으로 디지털 정보와 인간의 지각이 만나는 곳이다.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의 산물인 가상현실은 어떤 상황을 실제인 것처럼 체험할 수 있는 개념이다. 가상현실이라 하면 중년층은 게임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스마트폰 세대에겐 일상이 된 지 오래다.
가상현실 기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의 힘을 보여줌과 동시에 우리 삶을 바꿔놓을 정도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가상세계는 더 이상 가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창조했지만 언제든 무서울 정도로 현실세계를 뒤흔들 수 있다. 가상현실이 주는 흥미·안락·만족감에 빠져들어 가상세계를 현실의 도피처로 삼는다면 그 폐해는 아주 심각해진다.
2010년 3월 사이버소녀를 양육하는 게임에 빠진 한 부부가 생후 3개월 된 딸을 방치해 굶겨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부부는 사이버 캐릭터에게 옷과 장신구를 사주고 블로그에 육아일기를 쓰는 등 갓 태어난 자신들의 딸보다 더 신경을 썼던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었다. 섬뜩하기까지 한 이 사건은 가상현실의 수준이 자연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가 돼 가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가상현실 시뮬레이터는 오래전부터 활용돼 왔다. 우선 위험한 상황과 직결되는 분야, 예를 들어 폭발물이 있는 현장이나 화재현장에 투입되는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기 어려운 환경을 직접 체험하지 않아도 그 환경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만들어 이를 조작할 수 있게 해준다.
훈련비용이 엄청나게 요구되는 우주항공기나 전투기 조종훈련은 물론이고 무인항공기 원격조종은 프로게이머 수준의 기량이 필요할 정도가 됐다. 군 특수요원들이 중대한 작전을 앞두고 있다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시나리오를 시뮬레이터로 실시간 반복 훈련하면서 이들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낼지를 판단한 후 작전에 임하게 될 것이다.
이외에 외과의사 수술실습, 문화재 복원, 쇼핑몰 체험 등 다양한 분야에 활발히 응용되고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영국 자연사박물관과 함께 540만년 전 지구 해양생태계를 체험할 수 있는 가상현실 프로그램을 선보이기도 했다.
여기에 사람의 눈으로는 진짜와 가짜를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디스플레이, 허구적 현상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3차원·4차원 그래픽 기술, 다른 공간의 존재가 현실공간으로 들어오는 홀로그래피, 가상적 존재를 통해 교감하게 만드는 아바타 등과 같은 인간 중심적 기술이 가상현실과 결합하면서 더 ‘진짜’인 것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다.
가상현실이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현실과 유사한 다른 현실이라면 증강현실(AR)은 인간이 실제로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도록 실제와 겹쳐 보여주기 때문에 현실감이 뛰어나다. 증강현실은 현실과 가상환경을 융합한 복합형(hybrid)이어서 복합현실(MR:Mixed Reality)이라고도 한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은 주체가 허상인지 실상인지에 따라 명확히 구분된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주변을 비추기만 하면 인근에 있는 상점 위치나 메뉴가 입체영상으로 표현된다. 안경 없이 움직이는 3차원 홀로그램은 입체감과 함께 움직임까지 제공하며, 영상 속 물체를 360도 각도에서 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홀로그램은 가상 속 사물을 마치 현실과 같은 모습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자신이 원하는 홀로그램을 부르면 가상 캐릭터가 현실로 나타나는 일들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현재 증강현실 기술로 주목받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구글 글라스다. 이 스마트 안경은 기본적으로 음성 명령을 통해 인터넷 검색이나 이미지 촬영, 길 안내 등이 가능하다. 한쪽 렌즈에 화면 출력용 프리즘이 장착돼 있어 약 25인치 크기 가상화면이 눈앞에 나타난다.
이렇듯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대체로 불확실해져 가고 있고 기술 발전이 남아 있는 경계를 허물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가상현실을 허구로만 볼 수 없다. 우리는 디지털 기술로 시간과 공간 제약에 얽매이지 않고 가상이 아닌 또 다른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가상·증강현실 세계시장 규모가 2016년 40억달러에서 2020년 1500억달러(약 160조원)로 급성장할 것이란 예측이 이를 반영한다.
그렇다고 가상현실이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눈부시게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이 결합하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인지과학 발달로 컴퓨터는 인간 정서를 순식간에 분석하고 한발 앞선 예측으로 논리적 인간을 대체해 나가고 있다. 다량의 데이터 처리능력을 갖춘 인공지능이라면 인간의 모든 감각과 연동해 인간이 가상 공간에서 하는 행동을 진짜라고 착각하게 만들지 모른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가상현실이 필터링해 보여주는 세상에 갇힐 수 있다는 것이다.
손영동 고려대 정보보보대학원 초빙교수 viking@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