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해가 온종일 계속되지는 않는다”(박진수 LG화학 부회장) “1분기 실적 개선은 알래스카의 여름이다”(정철길 SK이노베이션 사장)
정유·석유화학업계 간판 CEO들이 호실적 앞에서도 위기론과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상반기 국제 유가가 안정적 흐름을 보인데다 수요 회복으로 수년 만에 최고 실적을 올렸지만 해외기업 증설, 중국시장 점유율 하락, 마진 감소 등 실적 악화 요인 또한 상존하고 있어 낙관만 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박진수 LG화학 부회장은 20일 나주공장을 방문해 “경영 환경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고 글로벌 기업과 경쟁도 한층 치열해지고 있다”며 “에틸렌 수급 불균형 등 외부 요인도 있는 만큼 올해는 철저하게 외부 요인에 기인한 성과를 배제하고 차별화된 고객 가치를 창출했는지 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부회장은 “LG화학만의 방식으로 성장을 만들어내야 하지만 대규모 신규 사업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성장 속도가 더딘 상황”이라며 “R&D에서도 사업 성과에 기여할 수 있는 신제품 및 신기술 개발은 부족한 것이 우리의 냉정한 현실”이라고 진단했다.
박 부회장 발언은 2분기 호실적을 올린 가운데 나와 주목된다. LG화학은 2분기 영업이익 5000억원을 회복했다. 7분기 만이다. 그러나 박 부회장은 이런 성적이 계속 유지될지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2분기 실적도 대외환경 개선으로 인한 반사이익 덕을 봤다고 설명했다.
지난 1분기 정철길 SK이노베이션 사장 발언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37년 만에 영업손실을 기록한 뒤 올해 1분기 3200억원 규모 영업이익을 올렸다. 정 사장은 정유업계 실적회복을 두고 ‘알래스카의 여름’에 비유했다. 업계 실적개선이 혹한이 몰아치는 알래스카에 찾아온 일시적 여름에 불과하다는 의미였다.
정유·석유화학 업계 CEO가 연달아 위기론을 앞세우는 것은 국제유가·수급과 관련한 대외 불확실성이 점차 커지고 있는 데 기인한다.
석유화학에선 당장 올해 하반기부터 실적 개선을 견인한 에틸렌 제품 공급이 늘어날 전망이다. 유럽 나프타크래커(NCC) 설비가 재가동되기 때문이다. 3분기 인도 릴라이언스(135만톤), 연말 사우디아라비아 사다라 프로젝트(120만톤) 증설이 예정돼 있다. 내년에도 아시아, 유럽에서 NCC 설비 재가동이 예정돼 있어 유럽지역 PE·PP 범용제품 수입수요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유안타증권은 내년말부터 우리 기업 생산제품이 갈 길을 잃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박 부회장이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 필요성을 강조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정유 분야에선 이미 정제마진이 떨어지고 있다. 로이터톰슨 기준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은 이달 초 배럴당 6.1달러로 연중 최저치를 기록했다. 정제마진은 원유와 제품가격 차이로 정유사 영업이익 핵심 지표인데, 지난해 8.5달러 기록하며 정유사 영업이익 상승을 견인했지만 최근 공급 증가로 떨어지고 있다.
유안타증권은 내년 중국, 사우디, UAE, 이란 등 증설로 하루 151만배럴이 추가로 시장에 풀릴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올해 공급량 대비 약 60% 이상 늘어난 수치다. 내년 하반기 공급이 집중돼 당장은 공급에 대한 우려가 없지만 우리 기업 활동에 걸림돌이 될 공산이 크다.
석유학업계 관계자는 “석화·정유업계가 상반기 깜짝 실적을 올리고 있지만 장기적 회복 사이클에 접어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며 “각사 CEO들이 보수적 관점에서 시장을 예측하는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대외여건에 대한 부담이 갈수록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최호기자 snoop@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