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주인은 창업자도, 경영자도 아닌 주주다. 100원짜리 회사 주식 1원어치를 가진 사람은 1원만큼만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이런 사람이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고 경영자를 선택한다면 정상적 회사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우리나라에서 비일비재하다. 많은 대기업집단이 순환출자라는 ‘마법의 손’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적은 돈으로 기업 좌지우지…순환출자 폐해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은 그룹 전체 지분의 0.05%를 갖고 있다. 롯데를 100원짜리 그룹이라고 가정하면 0.05원의 소유권을 가진 셈이다. 신 회장 직계가족 지분을 모두 합쳐도 1.94원에 불과하다. 결국 채 2원도 안 되는 돈으로 롯데 총수 일가는 100원짜리 그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롯데가 논란 중심에 섰지만 다른 대기업집단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국내 10대 그룹(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롯데, GS, 현대중공업, 한진, 한화, 두산) 총수 전체 계열사 지분율은 평균 0.25%에 불과하다. 직계가족 보유분을 모두 더해도 지분율은 평균 0.49%에 머문다. 하지만 이들은 순환출자를 활용해 제재 없이 기업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순환출자는 기업 출자방식의 하나다. 기업 출자는 크게 단순, 상호, 순환 형태로 나뉜다. 단순 출자는 지주회사가 계열사 일정 지분을 보유하고 계열사 사이에는 출자가 없는 것이다. 상호출자는 두 기업이 서로 지분을 보유하는 형태다. 순환출자는 상호출자를 확대해 A기업이 B기업 지분을 갖고 B기업이 C기업 지분을 보유하며 C기업은 다시 A기업 주식을 갖는 ‘A→B→C→A’ 형태 출자다.
순환출자는 실체가 없는 ‘가공자본’을 만든다. 실제로 돈이 오가지 않는데도 장부상 표기로 기업이 과대평가를 받는 등 사실을 흐릴 수 있다. 하지만 가공자본 형성은 실제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평가가 있다. 연결재무제표를 활용해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순환출자의 가장 큰 문제는 ‘가공의결권’으로 정리된다. 가공의결권은 직접 주식을 갖지 않으면서 보유하는 의결권으로, 롯데처럼 총수 일가가 실제 보유 지분 이상의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때 ‘1주=1표’ 원칙이 무너져 다른 주주가 손해를 보게 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문제는 순환출자에 의한 가공의결권 도움이 없었다면 관철할 수 없었을 지배주주 의견이 관철된 때”라며 “이때는 일반 주주 의결권이 침해되고 주주총회 의사결정은 가공의결권 때문에 왜곡되므로 사회가 개입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순환출자가 이뤄진 계열사 간 부당지원도 문제로 지적된다. 일감 몰아주기 등으로 계열사를 지원하는 행태는 공정한 경쟁체계를 무너뜨리고 특정 주주에게 피해를 준다.
◇대기업집단 해외계열사 현황 공개…이걸로 충분할까?
롯데 사태를 계기로 여당과 새누리당은 대기업집단 해외계열사 현황을 의무 공시하도록 공정거래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종전 의무공시 대상이 국내계열사로 한정돼 롯데처럼 해외계열사가 국내계열사를 지배해도 관련 정보를 정부가 명확히 알 수 없다는 이유다. 신학용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이런 내용을 담아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최근 발의했다.
신 의원은 “대기업집단이 외국법인 계열사를 통해 상호출자할 때에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이 없고 이를 파악하지도 못하는 문제가 있다”고 개정안 발의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기존 순환출자 금지’를 추진하지 않으면 근본 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013년 국회는 신규 순환출자를 금지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새로운 순환출자 형성, 기존 순환출자 고리를 강화하는 추가출자를 금지한 것이다. 하지만 기존 순환출자는 금지하지 않았다. 대신 공시 의무를 부과해 점진적·자발적 해소를 유도하기로 했다. 기존 순환출자를 금지하는 법안은 지난 2012년 발의됐지만 여전히 국회에 계류됐다.
당정은 이번에도 기존 순환출자는 건드리지 않았다. 새누리당은 “기존 순환출자 해소는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기업 활동에 부담을 줄 우려가 크다는 점에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며 “앞으로도 순환출자 현황 공시, 변동내용 공개로 순환출자를 기업 스스로 해소하도록 유도할 것”이라고 전했다.
반면에 야당은 기존 순환출자 금지를 다시 추진하기로 해 앞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관심이 쏠린다.
김기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3년 유예기간을 두고 대기업집단이 기존 순환출자를 해소하도록 공정거래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김 의원은 “정무위에 계류된 기존 순환출자 해소를 위한 공정거래법 연내 개정을 추진할 것”이라며 “롯데그룹 사태가 국민적 지탄이 대상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극소수 지분만으로 황제 경영을 가능하게 하는 순환출자구조 개혁을 반대할 명분이 없어 정부·여당이 연내 처리에 적극 협조할 것”으로 기대했다.
유선일기자 ys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