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3월, ETRI에서 시작한 연구원 생활이 어느덧 36년을 넘어 정년을 앞두고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나는 그동안 무궁화위성 소형지구국 개발을 비롯한 디지털위성방송, WCDMA, 모바일 RFID, 대전 공용자전거 타슈 등 방송통신 분야 연구개발에 혼신을 다했던 사업들이 결실을 맺을 때 즐거움도 컸다.
그간 정부 R&D 혁신체계 변화에 대한 많은 노력이 있었고 부단히 연구환경 개선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정부 연구개발과 관련해 지속 가능한 대원칙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늘 해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구원 자신의 일관된 신념이다. 연구개발 시작과 끝은 연구원 자신 책임이기 때문이다.
연구 프로젝트 기획과 수행 방법을 가장 깊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하는 사람도 바로 연구원이다. 연구원뿐만 아니라 연구책임자에게 맘 놓고 편히 연구할 수 있는 환경조성과 더불어 자율권이 주어져야 하는 이유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미래창조과학부가 기획한 연구성과 70선 선정은 참으로 뜻 깊다. ETRI서 주관기관으로 책임지고 개발한 전전자교환기(TDX), DRAM, CDMA, 와이브로(WiBro) 등을 보노라면 내가 젊었을 때부터 쏟아 부은 정열과 노력에 ‘정보통신 강국, 대한민국’ ‘IT강국 코리아’라는 훈장을 달아준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다.
과거 성공적인 정부 프로젝트가 부처 리드 아래 ETRI를 중심으로 산·학·연이 똘똘 뭉쳐 성공이라는 축배를 들기까지에는 많은 우여곡절과 눈물이 배어있다. 당시에는 연구원들이 사회적으로 우대받고 존경받는 직업군이었다. 그만큼 연구책임자에게도 지금보다는 많은 자율성과 전문성을 인정해주는 분위기였다.
지금은 달라졌다. 향후 국가 연구개발 체계에 있어 연구책임자에게 보다 많은 배려가 필요하다.
나는 연구책임자로 재직하며 디지털 위성방송 프로젝트를 수행한 바 있다. 정부의 전폭 지원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모자란 예산은 연구책임자 뜻을 존중해 과감히 증액했다.
198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ETRI 연구비는 지금의 16% 수준인 400억원에 불과했다. 이 중 대략 절반 정도는 TDX 등 정부가 요구하는 사업에 배정했다. 나머지 절반은 ETRI가 자율적으로 프로젝트를 기획, 선정하고 수행했다.
실제 각 연구단 실장 대표들은 몇일에 걸쳐 전남 장성 백양사 등 조용한 회의실을 애써 찾아 마라톤 협의를 했다. 제안 과제를 연구원 스스로 검토하고 선정했다. 하지만 과제선정 결과를 두고 그 어느 누구도 프로젝트가 없을 거라는 걱정보다는 프로젝트를 어떻게 수행해야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지가 늘 큰 고민거리였기에 합의된 안을 가지고 홀가분하게 나올 수 있었다.
나중에 CDMA 프로젝트로 발전한 이동통신, ATM, MPEG 기술 등이 ETRI 내부 선정 과제로 그 기틀을 마련했다. 연구원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발판으로 오늘날 세계정상 이동통신 강국을 견인한 셈이다.
R&D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해외 사례를 살펴보면, 1900년 초 연구기금 사용 자유도를 보장한 영국 홀데인(Haldane) 원칙, 1911년 연구 책임자 자유도를 보장해 묻지마 투자를 계속할 수 있게 만들어준 독일 하르낙(Harnack) 원칙, 2006년 토니 테더(Tony Tether)가 정의한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 12가지 속성은 지속적인 성공을 위해 연구자유도를 극대화했다. 이런 원칙이 우리에게도 있었으면 하는 것이 바로 필자 소망이다.
내가 1991년 8월, 이태리 시칠리아에서 알레니아스파지오사와 소형위성지구국을 공동 개발할 당시 이야기다. 이태리 연구원들과 함께 팀을 이룬 우리 연구원과 면담을 시작한 이태리 팀장들이 파견 책임자인 나에게 몰려와 연구원 기술역량이 부족해 함께 일하기 어려우니 모두 바꿔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언어와 환경 적응에 어려움이 있어 그러니 1년만 지켜봐달라고 사정했다. 그 후 연구원들은 이태리 측과 자존심 대결이 이루어 졌고 실패하면 지중해에 모두 몸을 던질 각오로 연구개발에 전념했다.
그 결과 1993년 말 우리가 개발했던 시스템은 잘 동작하는데 이태리 시스템은 문제가 있었다. 이듬 해 초 이태리 팀장들은 ETRI를 방문해 오히려 시스템 기술을 배워갔다.
보다 높은 가치 창출이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믿음을 바탕으로 각자가 잘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우리 연구개발에 있어 근간을 이루는 지속가능 원칙의 대전제가 되어야 한다. 연구원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분위기와 환경은 연구원 창의성을 일깨울 전제조건이다.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한 국가적 합의와 선언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더욱 더 절실하다. 그래야만 10년 아니, 100년을 위한 지속가능한 창조경제가 바로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채종석 ETRI 방송통신미디어연구소 연구위원 jschae@et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