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남북 고위당국자 접촉은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두 지도자를 뒤에 두고 진행된 대리전이었다. 회담 현장이 양측에 실시간 중계되면서 남북 정상 모두 수시로 상황을 확인해 지시내린 것으로 파악된다. 두 지도자가 직접 만나진 않았지만 사실상 정상회담 전초전을 치뤘다.
박 대통령은 남북 협상에서도 특유의 ‘원칙론’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박 대통령은 고위급협상이 한창 진행 중이던 24일 오전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북한 도발행위 사과와 재발방지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라며 북한을 압박했다. 대통령 말 한마디가 협상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상황에서 마치 북한에 들으라는 듯 강공카드를 던졌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정치·사회 이슈에서 고집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원칙을 강조하던 성향을 남북 협상에서 그대로 드러냈다.
북측 대표가 현장에서 박 대통령 메시지를 전해들은 후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확인되진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북한에 한국 정부의 강경한 입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한 셈이 됐다.
김 위원장도 옅으나마 자신만의 색채를 드러냈다. 김 위원장은 지도자 경력이 짧은데다 북한을 벗어난 대외 활동을 하지 않은 탓에 국제사회에 알려진 바가 적다.
김 위원장은 앞서 김일성·김정일과 유사하게 무력도발 후 북한 소행설을 부인하고 긴장 분위기를 조성하는 전술을 취했다. 도발을 일으켜 위협하고 다시 대화를 제의해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북한 단골메뉴다.
김 위원장은 협상 과정에서는 과거 북한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북한은 무박 4일에 걸친 마라톤 협상에서 판을 뒤엎진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갑작스레 회담에 불참해 상대를 당혹스럽게 하는 일도 없었다. 과거 남북 협상은 북측의 일방적인 불참 통보로 지연 또는 중단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북측 대표가 협상이 길어지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임한 것은 김 위원장 지시가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지 않고 폭넓은 논의를 허용한 것은 미약하나마 김 위원장의 유연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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