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디스플레이 장비 업체가 제품명을 변경했다. 제품 성능이나 특징이 달라진 건 없다. 겉옷만 갈아 입혔다. A 디스플레이 업체에 납품했던 실적 때문에 그동안 경쟁사인 B 디스플레이 업체엔 팔지 못해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다. 이 회사는 올해부터 새로운 브랜드로 B 기업에 공급한다.
이 회사 제품은 디스플레이 제조 공정에서 품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제품군이 아니다. 양산 과정보다는 후처리 작업에 필요한 제품이다. 디스플레이 화질이나 성능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이른바 ‘크리티컬’한 제품이 아닌데도 수년 동안 A 업체 외엔 납품할 수 없었다. 경쟁사에 납품했다간 ‘눈칫밥’ 신세를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실적이 악화되면서 제품명을 바꿔 고객 확대에 나섰다. 해외 시장 진출도 계획하고 있다. A 기업에 들킬까봐 노심초사다.
국내 디스플레이 업계에선 A와 B 기업 공급 ‘라인’이 확연히 나뉘어 있다. 대부분이 독점 공급계약을 체결하기 때문에 한번 생산라인을 구축하면 변경이 쉽지 않다.
최근 한 외국계 장비 업체는 국내 A 디스플레이 업체와 공급 계약을 맺었다. 계약 조건에는 ‘3년간 국내 경쟁업체에는 판매하지 못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다만 중국 등 해외 디스플레이 업체에는 판매가 허용됐다.
디스플레이 산업은 업체 간 경쟁이 아닌 국가 간 경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국내 디스플레이 업체들은 여전히 국내 경쟁사가 가장 신경 쓰이는 존재다. 해외 업체에 뒤처지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국내 경쟁사엔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독점 공급계약은 후발 주자와 격차 유지에 필수 전략이다. 단 핵심 장비와 기술에 한해서만 유용하다. 공통적으로 쓰이는 범용 부품이나 장비 영역에선 이득이 별로 없다.
10여년 전 디스플레이 강국 일본을 꺾기 위해 국내 디스플레이 업계는 합심했다. 액정표시장치(LCD) 장비 개발도 공동으로 했고, 연구개발 시너지를 높이는 데 손을 잡았다. 중국이 턱밑까지 추격했다. 경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선 업체 간 대승적 ‘협업’과 ‘상생’을 고민해야 할 때다.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m
-
성현희 기자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