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온고지신] <83>광시계를 기다리며

[사이언스 온고지신] <83>광시계를 기다리며

알람 소리에 잠을 깨고 허둥지둥 출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선다. 컴퓨터 화면에 회의 시작 10분 전이라는 팝업이 뜨고 휴대폰에서는 메일이 도착했다는 메시지 음이 울린다.

점심시간, 한 잔의 커피 타임은 순식간에 지나고 서류와 지루한 싸움으로 오후 시간을 보낸다. 사무실 벽시계가 퇴근 시간임을 가리키자 사람들은 또 다른 저녁 일과를 위해 분주하게 나선다.

하루는 시계로 시작해 시계로 끝난다. 우리 주변 사방팔방에 시계가 널려있다. 어쩌면 사람 수보다 시계 수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시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눈에 띄지 않고 숨어서 작동하는 더 중요한 시계가 있다. 전화국이나 휴대폰 기지국에는 원자시계가 있어서 정확한 시간 신호를 공급하고 있다. 그래야만 전화나 휴대폰, 컴퓨터 네트워크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은 인공위성에서 오는 시간신호를 받아서 현재 자기 위치를 나타내는 장치다. 이 위성항법장치(GPS) 인공위성에도 원자시계가 여러 대 탑재돼 있다.

이런 수많은 시계 중에서 왕의 지위를 가진 시계가 있다.

가장 정확한 시계, 즉 표준시계다. 표준시계는 1초라는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정의하는 시계를 말한다.

세슘원자는 1초에 약 92억번 진동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세슘원자가 92억번(정확히 91억9263만1770번) 진동하는데 걸린 시간이 1초다. 1초라는 시간의 길이가 정확해야만 정확한 시각을 알려줄 수 있다.

우리나라는 대한민국 표준시계로 ‘KRISS-1’이 있다. 300만년에 1초 오차를 갖는 세슘원자시계다.

‘KRISS-1’은 영국, 미국, 독일 등 선진국에 비해 약 30~40년 늦게 연구가 시작돼 늦게 태어났는 데 태어나기까지 길고 긴 진통의 시간을 겪었다.

원자시계는 아주 예민한 장치기 때문에 주변 환경을 잘 갖추어줘야만 제 성능을 낼 수 있다. 온도와 습도 조절뿐만 아니라 전자기파와 자기장 영향을 최소화시켜주는 것이 필요하다.

요즘 정밀 실험실은 대부분 이런 환경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지만 20여년 전 국내 환경은 그렇지 못했었다.

그 당시 원자시계 연구에서 진전이 없을 때 미국은 연구비를 대주면 자기네가 만들어주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우리나라를 대표할 시계인데 어렵더라도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단호히 ‘NO’라고 답했다.

같은 시기 비슷한 연구를 하고 있던 일본은 그 제의를 받아들여 구입했다. 그러나 문제는 시계가 고장나면서 일어났다. 이런 정교한 장치는 자기가 만들지 않으면 자기가 고칠 수 없다. 몇 번 미국 과학자가 와서 수리했으나 결국 그 시계는 1~2년 뒤 정지되고 말았다.

‘KRISS-1’은 다른 선진국 시계보다 크기가 작지만 성능은 비슷하다는 장점을 가진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가 태어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세슘원자분수시계다. 이 시계는 ‘KRISS-1’보다 100배 더 우수하다. 조만간 이 시계가 우리나라 대표 표준시계가 될 것이다.

오늘날 정보통신기술에서 요구되는 시간의 정확도는 대략 1마이크로초(100만분의 1초)인데, 세슘원자시계는 그보다 100배 더 정확한 시간을 제공할 수 있다. 이는 시계로서의 역할 외에도 여러 가지 어려운 연구에 사용된다.

예를 들면 우주가 얼마나 오랫동안 안정 상태로 있을 것인지, 물리학법칙이 수억년이 지난 뒤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지 등을 알아내는 데 사용된다. 이처럼 세슘원자시계는 오늘날과 같은 정보통신 시대를 여는데도 크게 기여했지만 미래 인류의 운명을 예측하는데도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슘원자시계가 시계의 왕 자리를 내어놓아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과학기술 발전은 세슘원자보다 시계로서 더 안정적이고 우수한 원자들을 찾았고 그것을 이용해 시계를 만드는 연구가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재 여러 후보들이 등장해 서로 각축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어쩌면 어느 한 종류의 원자에 의한 독재가 아니라 여러 종류 원자에 의한 다수 표준시계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계들은 세슘원자보다 수만배 높은 진동수(빛의 진동수)를 가지고 있어 ‘광 시계’라고 부른다.

국내에선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이 이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호성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시간센터 책임연구원 hslee@kriss.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