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필호의 실크로드 속으로] (10) 한민족의 실크로드

[박필호의 실크로드 속으로] (10) 한민족의 실크로드

실크로드와 한민족과의 관련성을 찾으라고 하면 우리의 건축물 중의 일부가 라마식이라거나 또 어떤 것이 서역식이라고 하면서 관련성이 있다고 하고 일부 토기나 청동기 혹은 도자기 또는 불화 등이 어디 식이니 하면서 우리 민족이 실크로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 일반이다.

또한 우리 민족이 당초 어디에서 흘러왔는지는 아직껏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나 일설은 바이칼호 부근이 우리 민족의 발원지라고 하면서 부여, 고조선, 고구려 등으로 이어지는 북방기원설을 주장하고 더 나아가 기마민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학설은 우리 민족의 한 갈래는 현재의 중국의 절강성 일대에서 북상하여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 정착하였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한민족이 이동했던 길, 긴세월에 걸쳐 이동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주변 문화와 접촉했던 길, 어느 한 지점에 정착하면서 생존이나 일상 생활을 위해 이웃 문화권과 교류를 했던 그 모든 길들이 바로 실크로드이다. 다시말해, 실크로드는 어떤 단일한 루트를 이르는 것이 아니라 부락과 부락 사이, 공동체와 또 다른 공동체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 문화권과 문화권 사이, 문명권과 문명권 간에 교류를 하기위해 이용을 했던 모든 길을 총체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중 중국 서안에서 시작하여 서쪽의 다마스커스에 이르는 실크로드가 가장 교통량이 높았던 길이었다. 그러나 실크로드는 유라시아 대륙에 동서남북으로 거미줄 처럼 얽혀져 있어 중국을 거치지 않아도 예컨대, 인도에서 시베리아 남부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길도 중요한 실크로드 였고 만주와 몽고 일대에서 카스피해 북쪽을 지나 유럽으로 들어가는 유라시안 초원길(Eurasian Steppe Route)도 아주 중요한 실크로드 였다.

만주와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의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탓으로 중국 서안을 종점으로 하는 간선 실크로드에서 지선으로 뻗어나온 마을버스 식의 실크로드를 주로 이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서양의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 민족의 터전이었던 만주지역이나 한반도에서 중국을 거치지 않고 직접 유라시안 초원길(Eurasian Steppe Route)을 이용하여 교류한 흔적도 상당히 많다.

현재 만주지역을 중국이 점령하고 있고 북한마저 한반도의 북부를 점유하고 있을 뿐더러 중국의 북방민족이었던 흉노, 거란, 여진족 등의 문화가 소멸된 탓으로이 부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몽고가 독립국가이며 바이칼호 주변의 부리얏트(Buryatia)도 러시아의 자치공화국으로 남아있으므로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우리민족의 유라시안 초원길을 통한 실크로드 교류사 연구에 적지 않은 학문적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유라시안 초원길을 통한 교류의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에 있는 아프로시압(Afrosiyob) 궁궐 벽화이다. 1965년 사마르칸드의 아프로시압 궁궐터를 공사하던 중 불도저의 삽날에 걸려 발견된 7세기의 궁궐 벽화는 당시의 이 지역을 다스리던 소그드(Sogdiana)의 바르후만(Varkhuman) 왕이 여러나라에서 온 사절들을 접견하는 그림인데 이곳에 조우관(깃털모자)을 쓴 두 명의 사절이 등장한다. 이 벽화에 대한 해석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나 조우관을 쓴 사절이 고구려인들이라는 것은 동서양의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사절을 영접하는 시기에 관하여는 학자들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대체적으로 7세기의 ¾에 해당하는 기간 즉, 서기 650~675년 사이로 보고 있다. 다수 학자들은 당나라에 대항하던 연개소문(AD 665년 사망 추정) 집권기에 사신을 파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신을 파견한 때를 연개소문 집권기로 본다면 당태종이 고구려를 두차례나 침공하였으나 실패했던 시기로 연개소문이 사신을 보내는데 일반 대상들이 많이 이용하는 당나라 영토의 실크로드를 사용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따라서 북방의 유라시안 초원길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사마르칸드의 사신도는 한민족이 가장 멀리 진출한 증거로 남아있지만 그 얼마 전인 서기 642년 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는 중국 둔황의 석굴벽화 여러군데에서 조우관을 쓴 한국인이 여러 명 등장한다. 이런 증거들은 한민족이 유라시아 대륙의 맨 동쪽 끝에 위치하며 서쪽에서 오는 문화를 받아들이는 일반적 패턴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서진한 증거로서 의미가 깊다고 할 것이다.

그 외에 덕흥리 고분 벽화(AD 408년) 등에 표현된 화염문(불이 타오르는 모양의 그림)이나 무용총 벽화(5세기 전반)의 수렵도, 고구려 삼실총 벽화(5세기 후반)에 나타난 지그재그식 담장 그림 등도 실크로드 상에 존재하는 유사한 내용의 벽화들보다 이들 고구려 벽화들이 연대가 앞섰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이들 역시 우리가 적극적으로 서쪽으로 진출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에 내분이 일어난데다가 신라와 당나라의 협공으로 멸망(AD 668)하고 그 영토는 당나라의 도호부로 있다가 잠시 후 그 일대에 발해가 세워졌다. 한반도의 반쪽을 차지한 신라는 발해와 사이가 좋지 않게 되자 중국 대륙과 교류하기 위해 바닷길을 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발해의 일반적인 역사와 대외교류에 관한 부분이 대부분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발해가 어떤 실크로드를 주로 이용하여 대외적인 교류를 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 역시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실크로드도 이용하였겠지만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북방의 유라시아 초원길을 더 많이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앞으로 이런 부분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실그로드와의 연관성이라 함은 그런 낱개의 역사적 증거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분야가 실크로드 교역의 산물인 것이다. 궁궐과 성벽은 물론 개인이 집을 짓고 담을 쌓아도 그런 건축술이 모두 실크로드를 타고 넘어 온 것이며 의복을 만들어 입는 그 자체도 실크로드를 통해 교류를 하다보니 그런 기술도 주고 받은 것이며 각종 식량을 재배하고 수확하며 요리를 하는 그 자체가 모두 실크로드 교역의 산물이다.

흥부전은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고유의 민담으로 알고 있지만 중앙아시아 일대에도 아주 똑같은 내용으로 흥부전이 존재하며 나뭇꾼과 선녀의 이야기, 별주부전 같은 이야기도 실크로드를 따라 모두 같은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사람들과 티벳 사람들의 춤사위도 우리의 것과 유사한 것이 많음은 물론 가락도 비슷한 것이 많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고전도 그 보다 연대가 앞선 카자흐스탄의 유명한 고전 서사시와 비슷하며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같은 비슷한 내용의 구전문학을 실크로드를 타고 서로 주고 받은 증거도 많다.

이와 같이 유라시아 대륙에 거미줄 처럼 펼쳐진 실크로드는 어느 누구의 점유물도 아니며 어느 국가나 민족이 지배적 우월권이나 우선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 안에서도 어느 특정 지역이 실크로드와 더 밀접하다거나 더욱 더 강한 연고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난센스 일 뿐이다. 고조선, 부여, 옥저,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발해, 고려, 조선이 모두 동등하게 실크로드의 이용자들이며 그들 모두가 그 영향권 아래서 흥망성쇠를 거듭했을 뿐이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필자소개/박필호

현재 유네스코 중앙아시아학 국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

과거 미국 뉴욕주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무형문화유산센터 법률고문을 지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외무부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