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3주년 특집]100년 장수 기업의 비밀

‘영속=영원히 계속하다’.

‘영속 기업’은 기업의 공통된 바램이다. 한 치 앞도 예측하기 어려운 무한경쟁 시대에 접어들면서 ‘영속기업’은 이론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존’만이 희망인 기업이 대부분이다. ‘100년 장수기업’ 목표는 매년 멀어지고 있다.

세계 500대 기업 평균수명은 40~50세. 우리나라 코스피 상장기업(2011년 기준) 686개 평균수명은 33세. 국내 대기업 평균 수명은 27세. 우리나라에서 100년 장수기업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기적이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100년, 200년, 1000년이 넘도록 영속하는 기업이 있다. 이들 기업은 끊임없이 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사업 다각화를 통해 지속적인 발전을 추구한다. 특히 제조업 경쟁력 근간이 되는 기초소재·화학 산업에서 수백 년 역사를 지닌 업체를 많이 볼 수 있다. 이들은 글로벌 ‘혁신’ 기업으로서, 또 사회적 ‘국민’ 기업으로서 존경받고 있다.

◇끊임없는 혁신, ‘지속가능성’ 사업에 집중 투자

시대 변화에 맞춰 혁신을 거듭해야만 기업은 영속할 수 있다. 100년 이상된 장수 기업의 공통점에는 ‘조급함’이 없다. 단기성과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10년, 20년 뒤를 보고 장기적인 투자 계획을 세운다. 대대적인 사업 및 조직 개편이 창립 기념일에 맞춰 이뤄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최소 10년 단위다.

올해 창립 347주년을 맞은 독일의 대표적인 화학소재업체 머크는 잠재성장 가능성에 우선순위를 두고 투자하는 대표 기업이다. 액정표시장치(LCD) 패널 핵심 소재인 ‘액정(Liquid Crystal)’ 분야에서 글로벌 1위인 이 회사는 액정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기술 성장가능성을 보고 20년 전부터 투자해 왔다. 이들은 기술 혁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우리나라를 택했다. 혁신 파트너로 국내 디스플레이 업체와 손잡았고 수년간 우리나라에 1000만유로(약 132억원) 이상을 집중 투자했다. 수익성이 높지 않는데도 투자는 지속된다.

지난해부터 주목하기 시작한 퀀텀닷 소재 분야에도 10년 전부터 발을 담갔다. 관련 원천 소재 기술을 확보하고 있는 ‘큐라이트나노텍’ 지분을 확보하면서 공동 연구개발을 해왔다. 최근 이 회사 지분 100%를 인수했다. 투자 조건은 미래 가능성이다.

지난해 설립 100주년을 맞이한 글로벌 소재기업 바커는 단순 사업 확장이 아닌 기술을 기반으로 지속적인 혁신 사업을 추진해 왔다. 과학자들이 모여 설립된 연구개발 업체 바커는 산업용 아세트알데히드, 아세톤 등을 대량 생산하다 지난 1947년부터 실리콘 사업으로 주력 사업을 바꿨다. 이후 반도체 웨이퍼용 초고순도 실리콘과 건축용 폴리머 파우더 바인더 사업으로 확장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1865년 염료 사업에서 시작된 바스프는 비료 생산에 필요한 암모니아 생산, 그 뒤를 이어 플라스틱 제조에 나서면서 기능성 소재, 농업솔루션, 석유·가스 분야까지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단기 매출보다는 장기 연구개발에 집중해 핵심 소재 원천 기술을 선제적으로 확보했다. 이들은 지금도 도시 생활이나 사회 문제 해결, 태양광 비행기 등 장기 혁신을 위한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150주년 창립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쿠르트 복 바스프 회장은 “바스프 연구개발 원칙은 지속가능성”이라며 “모든 연구 개발은 경제·환경·사회라는 세 가지 면에서 균형을 맞춰가며 화학기술 혁신을 통해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상생·소통·에코시스템’

장수 기업들은 일찌감치 기술 협력 체제 구축에 많은 공을 들였다. 설립 초기부터 구축하는 에코시스템이 정장동력이다. 여기에는 ‘신뢰’가 쌓여 있으며, 상생하며 공존하는 기업가정신이 녹아있다.

독일이 수년간 유럽을 강타한 경제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수출 흑자를 기록하며 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장수기업과 이들이 구축해 높은 에코시스템 덕분이다.

바스프 경영이념은 첫 번째로 혁신을 추구하고 두 번째로 이 혁신을 외부 파트너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스프가 개발한 솔루션이 궁극적으로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 가는데 도움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외부와의 협력을 통한 혁신을 얼마나 중요시 해왔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외부에서 우군을 최대한 확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863년 설립된 벨기에 기업 솔베이는 특수화학사업부 본사를 서울로 옮겼다. 국내 전자 및 디스플레이 업체와 보다 가까이서 연구개발을 하기 위한 목적이다. 국내 기업과 OLED 합작 사업에 대한 기대감도 높다. 혁신 파트너로 지목한 뒤에는 장기적으로 친밀도를 높여나가는 게 이들의 전략이다.

지난 6월 방한한 장 피에르 클라마듀 솔베이그룹 CEO는 “앞으로도 인건비가 싼 중국이나 베트남으로 생산 공장이나 연구센터를 이전할 계획이 없다”며 “한국 기업과 유대관계를 강화해 기술 혁신할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수기업들은 덩치가 커지면서도 유연성을 강조해 왔고 외부 고객·협력사와의 에코시스템 구축에 일관성 있는 전략을 추진해 왔다. 이는 ‘건강한’ 장수기업 필수 요건이자 핵심 요인이다.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