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연구장비 개발, 장기적 안목을 가지자

[ET단상]연구장비 개발, 장기적 안목을 가지자

30대 후반 늦깎이로 출연연 식구가 된 지 25년이 흘렀다. 내가 공부하던 시절은 남성은 석사학위를 가지고도 대학이나 연구소에 어렵지 않게 취업할 기회가 있었다. 반면에 여성은 이공계를 전공한, 그것도 지방 출신에게 직장 잡는 일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이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시려온다. 결혼 후 남편과 한 지역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고전적 사고방식에 얽매여 특정지역에 한정해 일자리를 찾았으니 더더욱 쉽지 않았다.

출연연 늦깎이 취업 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연구에 매달렸다. 은연중 거부하며 살던 여성연구원으로서의 존재도 인정하고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활동을 하며 여성연구원 권익 향상과 연구진흥 그리고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에 공을 많이 들였다.

부산에 살면서 서울, 대전 등을 오가며 연구와 사회활동, 가사를 병행하는 생활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간혹 서울 사람들이 지방에 오면 참 멀다는 말을 자주한다. 하지만 자주 다니다보면 물리적인 거리는 큰 의미가 없다. 연구원으로서는 자부심을 갖고 스스로 꼽을 수 있는 연구성과 하나면 피로는 만족감에 묻힌다.

지난 2008년부터 현재까지 진행해온 ‘28㎓ 초전도 전자 사이클로트론 공명 이온원 및 소형가속기’를 자체 개발한 성과가 오늘을 있게 한 근원이다. 처음 대학원생 두 명과 연구원 한 명으로 구성된 보잘것없던 연구팀을 꾸려 일본 이화학연구소와 국립방사선과학연구소, 전자 사이클로트론 공명(ECR) 이온원 워크숍 그리고 국내 유사 선행 연구팀을 무조건 찾아가 개념 설계를 놓고 토론하며 도움을 받던 일은 지금도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당시 상업화된 장비를 구입해 쓰는 것이 편한데도 굳이 개발해 쓰는 연구자들을 보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후 직접 장비 제작에 나섰으나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너무 많았다. 시뮬레이션 오차가 약간만 있어도 설계에 그대로 반영돼 시험작동 뒤에나 깨닫고 다시 해체한 뒤 보강해야 하는 시행착오도 종종 겪었다.

완벽한 설계가 진행된 대에도 제작상 작은 문제로 절연 오류가 생긴다든지, 밤새 정전으로 초전도자석을 유지하는 액체헬륨이 다 날아가 버리거나 주말 동안 냉각수관이 터져 연구동이 한강으로 변하는 일 등 때론 괴롭고, 때론 어이없는 일도 부지기수로 겪었다.

그만큼 완전한 연구장비 개발에는 끊임없는 보강과 수정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긴 시간을 인내해야 하고 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야만 연구장비 개발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깨닫게 됐다.

일본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세계 일류 또는 이류급 연구장비를 많이 개발해 세계에 보급하고 있다. 일본은 연구자가 아이디어를 장비 제작업체에 제공한다. 제작업체는 이 개념을 바탕으로 연구자와 상의해 장비를 설계하고 제작한다.

장비개발에 필요한 자금은 국가가 직접 제작회사에 지급해 내수 활성화를 도모한다. 개발된 장비 기술 시행이나 이전 등 권리는 연구자에게 주고 있다.

가속기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1970년대부터 꾸준한 투자를 진행해 왔고, 현재 미국 등과 나란히 어깨를 견주는 국가가 됐다.

요즈음 창조경제 활성화를 위해 연구장비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무엇이든 빨리빨리를 외치는 우리나라가 연구장비 개발에도 성급한 성과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연구장비 개발과 경쟁력 확보에는 철저한 계획과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속도를 늦추면서 실질적 성과를 도모할 방법도 함께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원미숙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부산센터 소장 mswon@kbs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