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은 고대부터 기술, 문화, 인재를 교류하며 발전해왔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은 일본 고대문화 ‘퍼스트 무버’였고 조선시대 통신사는 왜란 이후에도 양국을 오가며 외교사절단 역할을 했다. 1970~1980년대 한국은 선진 일본 기술을 들여오는 ‘패스트 팔로어’로 초고속 성장을 했다. 버블경제 이후 일본이 오랜 저성장 기조에 있을 때 한국은 인터넷서비스 창업과 벤처거품을 겪었다.
◇한국 스타트업, 일본 시장 ‘퍼스트무버’로=지난 15일 K-ICT본투글로벌센터는 일본 도쿄 NTT도코모벤처스에서 ‘K-글로벌 커넥트’라는 이름으로 일본 내 투자자를 대상으로 투자설명회를 열었다. 한국에서 철저한 사전 준비를 마친 IT&BASIC, 사이, 리니어블, 조이코퍼레이션, 스파코사, 시어스랩, 에바인, 엠바이트, 이리언스 9개사가 참여했다. 이 중에는 일본 현지 조인트벤처를 설립한 기업도 있고 파트너나 투자자를 찾는 기업도 있었다. 일본에서 유학하거나 사업 등 다양한 경험을 쌓은 창업자들이 유창하게 일본어로 비즈니스 모델 설명은 물론이고 질의응답까지 이어갔다.
다음날에는 스타트업 얼라이언스가 프릭아웃 이벤트홀에서 ‘재팬부트캠프’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재팬부트캠프는 한국 유망 스타트업을 일본 벤처투자자에게 소개하는 ‘코리안스타트업 데모데이’를 개최했다.
17일 교토에서 일본 유력 액셀러레이터인 비대시벤처스가 연 ‘비대시 캠프 2015’에도 퓨처플레이, 매쉬업엔젤스, 본엔젤스 등 한국 엔젤투자자가 투자, 지원한 20여개 한국 스타트업이 참가해 열띤 데모데이 경쟁을 펼쳤다. 한국 스타트업 일본 공략이 시작된 셈이다.
인구 1억명의 크고 안정된 내수시장과 유료서비스에도 기꺼이 지갑을 여는 일본 소비자는 한국 스타트업이 일본 시장을 매력적으로 여기는 이유다.
오치영 지란소프트재팬 대표는 “세계에서 우리나라와 가장 비슷한 시장이 일본”이라며 “동남아시아 시장과 달리 신뢰할 수 있는 시장이라는 것이 장점이고 일본과 가까이 있는 것은 축복”이라고 말했다. 특히 기업용 소프트웨어(SW) 시장은 한국보다 진입이 어렵지만 대가 산정이 투명하고 매출 성장세도 큰 것이 장점이다.
일본 벤처업계도 최근 투자자금이 몰리면서 한국과 마찬가지로 성장세를 보일 전망이다. 또 활발한 기업벤처캐피털(CVC) 투자도 주목받고 있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도 “일본 스타트업 자금조달 건수는 늘지 않아도 벤처캐피털 투자 금액 자체는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리스크 부담에 부정적인 일본 벤처 시장에서 대기업 후원을 받는 것은 스타트업 활동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임 센터장은 “일본도 벤처 관심은 크지만 기업이나 청년 모두 실패를 걱정한다”고 전했다.
일본 정부 역시 기술사업화와 벤처 창업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 현지 관계자 이야기다. 선향 일본대사관 미래과학관은 “아베정부 들어 일본도 과학기술 정책이 과거 기초과학 진흥에서 실용화, 사업화로 화두가 옮겨갔다”며 “예산이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하면 혁신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와 대기업 역시 성장한계에 부딪혀 혁신 필요성은 느끼나 그것을 ‘창조경제’ 같은 범정부 차원 정책 추진으로는 풀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일본은 소비시장이 탄탄하고 기본 수요가 있으므로 만약 한국이 이런 수요를 받아들여 혁신 제품이나 서비스를 잘 출시한다면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스타트업 장기적 시야로 네트워크 쌓아야=일본 시장이 크지만 생각만큼 진출하기 어려운 것도 일본 시장이다. 창업은 물론이고 파트너 찾기, 투자 유치, 시장 진출까지 장기 전망을 갖고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
김범석 본엔젤스 일본사무소 대표는 “일본 벤처업계도 이른바 ‘이너서클’이 강하기 때문에 좋은 스타트업에 초기 투자를 하는 것은 쉽지 않다”며 “도쿄대는 내부 창업동아리와 도쿄대 동문에게만 투자하는 벤처캐피털이나 특허 출원 등 도와주는 기구도 있고 다른 명문 역시 끼리끼리 소개하고 투자하는 문화가 있어 선행투자가 이미 많이 이뤄져 외부에 잘 오픈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찌감치 일본 스타트업 시장 문을 두드렸던 본엔젤스는 현지에서 사무소를 운영하며 한일 네트워크를 쌓고 있다.
일본 디엔에이(DeNA)의 투자 담당자인 후카자와 마사토시 매니저도 “한국과 일본 모두 모바일과 인터넷이 발전하고 스마트폰을 많이 쓰지만 한국이 일본보다 더 많이 발달해 있고 창의적 기업이 많다”며 “단순히 투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디어와 기술을 접목할 수 있는 기업이면 더 좋겠다”고 말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일본 스타트업 생태계 수준도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매주 목요일 도쿄 시내에서 열리는 스타트업 모임에서는 스타트업 창업자나 CEO 발표를 대기업 임직원이 경청한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이 함께하거나 적용 가능한 사업 아이템을 살펴보는 자리다. 정부 지원이 한국만큼 크지 않지만 대기업 CVC나 B2B 시장을 겨냥한 스타트업 창업도 활발하다.
일본에서도 해외 진출에 적극적인 엔젤 투자자 활동도 눈에 띈다. 일본 최대 스타트업 콘퍼런스를 개최하던 일본 벤처 1세대인 사무라이인큐베이터도 거점을 이스라엘로 옮겼다. 창업자인 켄 사무라이 대표는 일본과 이스라엘을 오가며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사업 중이다. 그는 “글로벌 성공 벤처와 금융자본은 모두 유태계”라면서 “유대인 성공 비결을 확인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머무르고 있으며 특히 컴퓨터 프로그래밍 교육을 일찌감치 시키는 것에 놀라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 데모데이에 참가한 박문수 사이 대표는 “첫술에 배부를 리 없겠지만 장기적으로 네트워크를 쌓으며 준비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종갑 K-ICT본투글로벌 센터장은 “지속적인 정부 지원과 적극적인 스타트업 노력이 이어진다면 의미 있는 성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일본)=
김명희기자 noprint@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