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타트업을 향한 글로벌 벤처캐피털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 쿠팡이 최고 1조원에 초대형 딜에 성공했다. 국내 주요 스타트업에도 뭉칫돈 투자가 들어오고 있다.
반면에 한국 벤처캐피털 해외 투자는 걸음마 수준이다. 국내 벤처기업 해외진출에 교두보 역할을 해야 할 국내 VC 경쟁력 약화가 우려된다.
올해 상반기 해외기업에 100억원 이상 투자한 VC는 한국투자파트너스, KTB네트워크, 린드먼아시아인베스트먼트, 스틱인베스트먼트, LB인베스트먼트,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 6곳이다. 투자처는 대부분 중국에 집중됐다. 지난해보다 투자가 활발하지만 아직은 업계를 대표하는 일부 기업에 국한돼 있고 이마저도 해외 VC 국내 투자와 비교할 수준이 못 된다.
오히려 국내 벤처기업이 적극적인 해외 진출과 글로벌 인재 유치로 경쟁력을 높이는 동안에도 국내 VC 자생력은 모태펀드 등 정책자금 의존도만 높아지면서 투자 파트너로서 매력을 잃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종훈 국민대 벤처창업글로벌대학원 교수는 “국내 VC 자금은 대부분 모태펀드에서 나오고 까다로운 해외 기업 투자나 해외 투자자 유치에 크게 관심이 없다”며 “정책자금 목적이 결국 국내 기업을 육성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VC가 해외 진출이나 해외 시장에 굳이 모험을 감수하며 진출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인센티브도 낮다”고 설명했다.
◇해외 VC, 국내 벤처투자업계 ‘종횡무진’
국내 VC가 해외 투자에서 이렇다 할 성과나 투자가 없는 상황에서 해외 VC는 국내 시장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해외 VC는 작년 말 옐로모바일, 배달의민족 투자사례에 이어 올해 상반기에도 국내 벤처업계 빅딜을 주도하고 있다.
지난 6월 일본 소프트뱅크는 소셜커머스 쿠팡에 10억달러(약 1조1000억원)를 투자했다. 지난해 미국 VC인 세콰이어캐피털과 블랙록 등도 총 4억달러(약 4400억원)를 쿠팡에 쐈다.
뷰티커머스 미미박스도 지난 3월 2950만달러(약 330억원) 투자를 유치했다. 포메이션8과 굿워터캐피털 등 해외 VC가 투자를 이끌며 야후 창업자인 제리 양을 비롯해 유명 CEO 및 투자자가 대거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미국 실리콘밸리 기반 VC인 500스타트업도 올해 초 구글캠퍼스 서울에 사무실을 내고 ‘김치펀드’를 조성했다. 알테아, 피플펀, 코노랩스 등 한국 스타트업에 종잣돈을 투자했다. 본사 투자까지 합치면 10개가 훌쩍 넘는다. 알토스벤처스는 작년 6000만달러 규모 한국 펀드를 만들어 쿠팡, 배달의민족, 미미박스 등을 비롯해 ‘직방’ ‘비트’ ‘잡플래닛’ ‘토스’ 등 국내 스타트업 서비스에 투자했다. 1년 6개월 만에 15개 기업에 투자하면서 펀드는 절반 이상 소진됐다. 대부분 시리즈A 이상 대형 딜이었다.
해외 대기업 벤처투자도 눈에 띈다. 퀄컴은 벤처투자 자회사인 퀄컴벤처스를 통해 올해 상반기에만 모바일 증권 서비스 기업 두나무, 기업 정보 공유 사이트 잡플래닛, 빅데이터 기반 맛집 추천 서비스 망고플레이트에 총 100억원을 투자했다.
일본도 카카오 초기투자로 대박 신화를 낸 사이버에이전트벤처스가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며 글로벌브레인도 파이브락스 성공사례를 기반으로 커플메신저 앱 회사인 VCNC와 일러스트 작가 플랫폼 회사인 엠바이트에 잇달아 투자했다.
차이나머니는 일찌감치 국내 게임산업을 정조준했다. 중국 최대 인터넷기업인 텐센트는 카카오, 넷마블게임즈를 비롯해 국내 게임사 5곳에 7000억원이 넘는 거액을 투자했다. 이외에도 국내 대표 VC가 운용하는 펀드에 참여하고 있다.
해외 투자를 유치 중인 한 스타트업 대표는 “국내 벤처캐피털리스트 중에서 외국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으며 “투자를 받는 과정은 단순히 자본을 확대하는 것만이 아니라 파트너 확보 목적도 큰데, 국내 VC는 해외 네트워크가 없어 글로벌 시장 진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대로라면 국내 VC가 ‘끓는 물 속 개구리’로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 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국내 VC, 모태펀드 의존 낮추고 자생력 갖춰야
해외 VC가 벤처·스타트업계를 안방처럼 누비는 동안 국내 VC가 해외 기업 투자나 펀드에 참여하는 해외 투자자 유치는 몇 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VC 해외 진출을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은 투자 펀드 조성에서 정책 자금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내 VC는 초기부터 정부가 일자리 창출 등을 목적으로 벤처 투자 활성화에 나서면서 시장이 형성됐다. 벤처 투자의 가장 큰 목적을 내수시장에 초점을 맞췄기에 굳이 해외 투자를 적극적으로 시도할 필요성이 적은 것이다.
정책자금이 주요 출자자(LP)로 묶여 있는 펀드는 펀드 결성에서 주목적 투자 비율 등 엄격한 투자 요건을 맞춰야 한다. 해외 투자를 목적으로 만든 펀드가 아니면 해외 기업 투자를 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모태펀드는 매년 출자예산을 기반으로 서류심사, 현장실사, 최종심의를 통해 출자 대상 자펀드를 선정하는 까다로운 과정을 거친다. 자체 투자심의나 의사결정 속도가 해외 VC 대비 느리다는 문제도 있다.
반면에 해외 VC는 기업 자금이나 엔젤 등 민간 참여 비중이 높아 적극적 해외 진출이 가능하다. 구글, 인텔, 퀄컴 등이 운영하는 기업벤처캐피털(CVC)은 현지 법인을 활용해 정보 수집이나 투자를 진행하는 게 용이하다.
해외 VC는 국내 유명 창업자나 CEO를 VC로 영입해 네트워크를 쌓는 데도 적극적이다. 박희은 이음소시어스 창업자를 영입한 알토스벤처스나 김치펀드를 운용하는 500스타트업도 스타트업 출신인 김은혜 투자심사역 등을 영입해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경험을 활용하고 있다. 창업자 역량을 VC가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례다.
최근 국내 VC업계에서도 해외 진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당장 국내는 활발한 초기기업 투자에 비해 자금 회수(EXIT) 시장이 부족하고 스타트업이 기업공개(IPO)를 하는 데 평균 12년이 걸린다는 문제가 있다.
반면에 미국, 중국 등 유망기업에 투자했을 때 상대적으로 상장이나 인수합병(M&A) 등을 통한 자금회수가 빠르고 수익률이 높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 등에서 전문 인력 확보나 교육, 교류 방안 등을 놓고 고심하는 상황이다.
국내에서도 민간 투자자만으로 펀드를 구성한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 등은 일본에 연락사무소를 열고 장기적으로 투자 가능성을 열어뒀다. LB인베스트먼트는 중국 더나인 부사장과 알리바바그룹 게임담당 총괄이사를 지낸 박순우 상무를 영입해 중국 네트워크를 확보했다.
이종훈 국민대 벤처창업글로벌대학원 교수는 “문화나 외국어 등의 한계는 인정하고 장기적으로 대기업의 벤처 투자 활성화 등 민간 참여 확대를 위한 방안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김명희기자 noprint@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