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신화에 코린토스 땅 벨레로폰 영웅 얘기가 나온다.
벨레로폰은 옆 나라에 피신해 있던 시절 그 나라 왕비가 던진 추파를 거절했다가 미움을 사 어려운 임무를 부여받게 됐다. 머리는 사자, 몸통은 염소, 꼬리는 뱀을 닮은 괴물 키마이라를 처치하라는 명령이었다. 불을 뿜고 다니는 바람에 사람과 곡식에 큰 피해를 주던 존재였다.
벨레로폰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말인 페가수스를 황금고삐로 잡아 길들인 덕에 키마이라를 처치하고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불을 뿜는 화산을 빗대어 만들어진 괴물인 키마이라는 서로 다른 생물의 특징이 하나의 몸으로 합쳐진 결과물이다. 영어로는 키메라(Chimera)라고 한다.
사람 상체와 말 하체가 합쳐진 켄타우로스, 황소 머리가 사람 몸에 붙은 미노타우로스, 독수리 상체에 사자 하체가 붙은 그리피오스도 키메라 일종이다.
생물학에서 유전자를 조합해 새로운 세포나 동물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키메라라고 부른다.
키메라는 생물이 탄생하고 자라나는 과정을 살필 때 수정란 일부를 잘라내고 다른 세포를 집어넣어 새로 만들어낸 배아를 가리킨다. 흰쥐 수정란과 회색쥐 수정란을 결합하면 얼룩덜룩한 모습의 키메라 마우스가 탄생하는 식이다.
키메라 전설은 현대에도 멈추지 않는다. 19세기 소설가 메리 셸리가 쓴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대표적이다. 스위스 제네바 출신 물리학자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죽은 자의 뼈와 살을 이어 붙여 키 2.4m가 넘는 괴물 인간을 만들어낸다. 혼자 지내던 괴물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프랑켄슈타인 박사에게 여자도 만들어달라고 요구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박사 부인을 죽이고 결국 박사와 자신까지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야기다.
키메라 기술은 점점 발전해 이제는 사람의 유전자를 건드리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유전자와 염색체를 아울러 가리키는 게놈(genome)은 특정 생물체가 가진 고유한 특징을 지칭해왔지만, 이제는 게놈 수정과 합성 기술이 발달해 마음대로 바꾸고 잘라 붙이는 시대가 됐다.
사람 일이니만큼 커다란 논쟁과 다툼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의료기술 발달을 위해 인간 배아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불행의 씨앗을 없애기 위해 인간 유전자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8월 영국은 ‘10만 게놈 프로젝트’를 내세우며, 2017년까지 10만 명의 게놈 지도를 그리는 데 5000억원의 정부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9월에는 영국 의학연구위원회(MRC)가 “질병 치료를 위한 게놈 수정 기술을 허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곧이어 의료자선단체 웰컴 트러스트(Welcome Trust), 의료과학원(AMS), 생명공학연구위원회(BBSRC) 등 영국 내 기관들과 공동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의료계에서는 적극 찬성하는 분위기다. 각국 과학윤리 전문가로 이루어진 힝스턴 그룹(Hinxton Group)은 “인간 배아의 게놈을 조작하는 기술은 생물학과 의학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며 향후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몇몇의 우려 때문에 기술 자체를 금지시키는 것은 장기적인 손해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불치병과 난치병으로 인해 인류가 겪는 손해를 계산하면 오히려 게놈 수정 기술을 장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별 유전체를 광범위하게 수집하면 결국 개인정보 유출이 발생하게 된다는 지적도 있다. 장차 태어날 아이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도 없이 특정 인생을 강요당해야 하는 일종의 폭력행위와 마찬가지라는 비판도 잇따른다.
원하는 인간을 맞춤형으로 생산해서 소모품으로 사용하는 SF영화 속 상황이 실제 현실에 등장할지도 모른다.
단점을 버리고 장점만을 조합해 맞춤형 인간을 만들려는 시도는 어떻게 끝을 맺게 될까. 초능력을 갖춘 영화 엑스맨을 탄생시킬까 아니면, 미움과 박해 끝에 고통으로 사라진 신화 속 키메라를 되살려낼까.
임동욱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