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한국 반도체 R&D]<1>국가·기업, 차세대 기술개발 함께 뛰어든 이유

우리나라는 세계 메모리 반도체 1·2위 기업을 보유한 ‘반도체 강국’이다. 그 이면에는 메모리 반도체에 편중돼 비메모리 경쟁력은 중국보다 뒤처진 씁쓸한 현실이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반도체 강국이라는 타이틀에 갇혀 더 이상 정부가 산업 육성을 지원할 필요가 없다는 오해와 편견이 확산돼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만큼 ‘대기업에 예산 퍼준다’는 불만에서 국회와 정부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고 정부와 기업이 차세대 개발에 함께 협력하는 새로운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2013년 시작한 ‘미래 반도체 소자 개발사업’이다.

전자신문은 5회에 걸쳐 미래소자 사업의 역할과 향후 나아갈 방향에 대해 알아본다. 산학연 차원 미래 기술개발 생태계가 얼마나 무너졌는지 현황을 파악해 ‘반도체 강국’ 위상에 가려 미래 경쟁력 준비에 소홀한 현황을 진단한다.

정부 연구개발 사업은 국가 차원에서 핵심 기술을 선행 개발해 국가 기술 경쟁력을 높이고 이를 기업에 이관해 산업을 육성하는게 목표다. 하지만 장기적 기술개발 사업은 당장 상용화가 힘든 특성 때문에 ‘가시적 성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고 단기 성향 기술개발에 치우치면 중장기 경쟁력을 소홀히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최근 국내 반도체 분야에서 정부 연구개발 사업 비중은 크게 줄어든 모습이다. 국가 정보통신기술(ICT) 전략을 총괄하는 미래부가 ‘반도체 강국’에 더 이상 정부 자금을 투입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 1·2위를 나란히 석권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정부 자금이 흘러들어간다는 부담도 주효하다.

이런 정부 기조는 최근 몇 년간 국내 반도체 연구개발 토양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반도체 산업이 정부 정책 사각지대에 놓이면서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곳은 대학이다.

반도체 분야 교수 1인당 석·박사 배출은 2002년 2.6명이었으나 2012년에는 1.3명으로 반토막 났다. 장비와 재료가 필요한 대학 반도체 연구실에 정부 사업이 급격히 줄다보니 교수진은 학생에 연구비를 지급할 여력이 없어졌다. 자연스레 나노·바이오 같은 타 분야로 이동하면서 학생도 줄었다. 미래 핵심기술 연구자를 배출하는 뿌리인 대학에 인력이 없어진 것이다.

반도체 기업도 비상이다. 반도체 기술 연구경험이 풍부한 인력을 채용해야 하는데 토양이 황폐해지니 석·박사급 확보가 어려워졌다. 반도체 비전공자를 채용해 최소 6개월에서 1년 이상 기본기를 가르치고 현업에 투입하는게 현실이다.

결국 산업부와 기업이 대안 모색에 나섰다. 정부와 기업이 일대일로 예산을 꾸려 미래 반도체 분야 기술을 개발하는 사업을 고안한 것이다.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견·중소기업까지 참여해 정부와 일대일 매칭펀드로 7년간 총 500억원을 투입하는 ‘미래 반도체 소자 개발사업’을 2013년 가동했다.

기업도 투자에 참여하지만 연구 결과물은 정부가 보유하고 특정 기업이 아닌 이 분야 여러 기업이 함께 연구 결과물과 인프라를 이용할 수 있는게 강점이다. 10나노 이하 반도체 실현을 위한 소자·공정·회로·소재·소프트웨어 등을 연구개발한다.

이 사업은 미국 SRC(Semiconductor Research Corporation) 모델을 벤치마킹했다. SRC는 지난 1982년 미국 15개 반도체 기업과 정부가 참여해 연간 1억달러(약 1130억원)를 투자해 미래 반도체 기술을 함께 연구하기 위한 연구컨소시엄이다. 현지 104개 대학에서 교수 500명, 학생 1500명이 참여한다. 약 30여년이 흐른 지금도 SRC는 활발히 활동하며 수준 높은 반도체 기술 인력을 배출하는 요람으로 꼽힌다.

국내에서도 한국형 SRC 기대감이 높다. 정부 자금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소위 ‘좀비 기업’을 차단할 수 있고 기업이 자금을 함께 투입하는 만큼 중단기 상용화에 필요한 연구개발 인프라 폭을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 향후 필요로 하는 기술을 대학에서 선행 개발하면 약 2~3년을 단축할 수 있어 전체 경쟁력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된다. 미세공정 기술 난이도가 높아져 연구개발 비중이 커졌지만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투입 리소스에 한계가 있는 만큼 대학과 협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무엇보다 한국형 SRC 모델의 가장 큰 효과는 당장 기업 연구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것이다. 풍부한 연구개발 인력을 갖추면 수준 높은 연구결과물을 도출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고 해당 분야를 충분히 경험한 전문 인력을 기업이 확보할 수 있다.

이 사업을 총괄하는 손현철 연세대 교수는 “기술개발과 인력양성은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유지하는 근간”이라며 “국가 기간산업인 반도체 생태계를 일부 대기업에 의존한다면 국가 차원에서 대응하는 경쟁국 추격에 맞설 체력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배옥진기자 withok@etnews.com

미래 반도체 소자 개발사업 현황

기간:2013년~2019년

예산:정부와 기업이 일대일 매칭 펀드로 500억원 투입

참여기업(투자기업)

1단계(2013년):삼성전자, SK하이닉스, AMAT, ASML, TEL, 램리서치

2단계(2014년):삼성전자, SK하이닉스, 테스, 오로스테크놀러지, 넥스틴

3단계(2015년):삼성전자, SK하이닉스, 원익IPS, 엑시콘, 케이씨텍, PSK 등 총 13개 기업

참여 연구기관:서울대, 연세대, 포스텍, 한양대, 서강대, ETRI, KIST, GIST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