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어느 나라보다 앞서 국가 차원 ‘원격검침인프라(AMI) 사업’ 로드맵을 세웠지만 매번 사업 중단과 지연을 반복했다.
스마트그리드 실현 첫단추 격인 이 사업이 지연되면서 스마트그리드 확산도 더뎌졌다. 정부 스마트그리드 확산 계획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무엇보다 정부·한전을 믿고 제품을 만들고 우리나라 구축 실적을 갖고 해외 시장을 뚫으려던 기업이 선점 기회를 놓쳤다.
한전은 2010년 50만호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매년 200만~250만가구에 AMI를 보급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한국형 전력선통신(PLC)칩 성능 미비와 입찰 과실, 특허권 논쟁 등에 휘말리면서 현재 보급 실적은 200만호가 전부다.
계획대로라면 이미 1000만가구 설치를 완료해야 했지만 현재 20% 수준에 머물러 있다. 앞으로 5년인 2020년까지 2194만가구 구축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업계 공통된 의견이다.
사업 원년인 2010년(50만호)에 한전은 국가표준에 못 미치는 부품을 적용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업을 중단시켰다. 이후 2년 만에 재개된 2012년 사업마저 성능 검사를 위한 벤치마크테스트(BMT) 절차상 과실이 드러나면서 또다시 중단됐다. 시험 장비 조작까지 더해지면서 두 건 모두 감사원 감사까지 받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2013년에는 2000년부터 정부 예산으로 한국형 PLC 개발에 참여한 젤라인이 사업에 선정된 업체를 대상으로 PLC 특허권 침해 민원을 제기해 또다시 진통을 겪었다. 결국 한전은 특정업체에 200만호 물량에 해당하는 6억8000만원 특허료를 지불하면서 논란을 봉합했다.
하지만 한전이 이후 해당 특허료를 사업비에 포함시키면서 사업수행 업체가 가져갈 실제 수익은 줄게 됐다. 국가 예산으로 개발한 한국형 PLC에 특허료를 발주 공기업이 지불한다는 논란은 여전히 꺼지지 않고 남았다.
최근엔 지중 환경에서 한국형PLC 통신 성능 저하현상이 발생하면서 새로운 논란이 피어났다. 한전은 사업시작 5년 만에 지중 통신 성능 해결에 나서며 최근 LTE와 지그비, HPGP(Homeplus Green Phy) 등을 채택할 방침이다. 한국형 PLC칩만을 고집했던 전략을 뒤늦게 수정한 셈이다.
관련업계는 2020년 목표 물량 공급이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200만호에 AMI를 구축하는 2013년 사업이 2년 가까이 지연되면서 지난 9월에야 완료된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잦은 사업 중단과 지연뿐 아니라 연간 목표 물량도 연내 수행이 어렵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미 글로벌 AMI 시장은 단순한 하드웨어 구축을 넘어 전기 무단 사용을 막거나 가전제품과 연동되는 등 다양한 융합사업으로 발전하는 반면에 우리는 시작조차도 못하고 있다”며 “정부가 AMI 데이터 활용방안을 내놓았지만 그에 앞서 구축을 위한 정확한 일정이 먼저 잡혀야 한다”고 말했다.
박태준기자 gaiu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