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을 오를 때 숙련된 등반가는 “아래를 보지 말라”고 한다. 고공에서 작업하는 사람도 아마 같은 얘기를 할 것이다. 지금 디디고 있는 발밑은 잘 살펴봐야겠지만 먼 땅을 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보자일수록 겁을 집어먹고 아래를 보게 된다. 그러면 다리가 떨리고 올라가기는 더욱 어렵게 된다.
캐나다 토론토에는 CN타워라는 매우 높은 구조물이 있다. CN타워 지상 400m 지점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전망대 바닥 일부를 두터운 유리로 만들어 관광객 담력을 시험한다. 그 유리바닥(글라스 플로어)은 매우 강해서 몇 사람이 올라선다 하더라도 깨지지 않도록 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거기에 올라서는 것을 두려워한다. 유리바닥이 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됐고 수많은 사람이 이미 거기 올라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을 보면서도 내가 올라가려면 두렵다. 아래를 보지 않아야 한다.
영덕 원자력발전소 건설과 관련해 논란이 많다. 영덕 주민들이 오늘부터 투표를 해서 찬반을 가른다고 한다. 지금 영덕에는 많은 환경운동가들이 방문해 주민에게 원자력 위험성을 선전하고 반대를 종용하는 것 같다. 그런데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들 집회에 원래 주민보다 더 많은 외부 인사가 참석하는 모양이다.
“원자력발전소는 위험하다. 기형아를 낳을 것이다. 자손만대로 환경에 악영향이 있을 것이다.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같은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두려움이 생길 것이다. 원래 사람은 조심성이 많은 동물이기 때문에 위험 정보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또 반복적으로 위험하다는 말을 듣게 되면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되지 않는 한 영향을 받는다.
아쉽게도 우리는 찬성하는 쪽보다는 반대하는 쪽 얘기를 많이 듣는다. 일부가 극렬하게 반대할수록 찬성하는 쪽은 입을 다무는 일이 흔하다. 때로는 주로 드러나는 반대 목소리에 밀려 정책결정이 내려지고 나중에 후회하는 일도 많이 발생한다.
원자력 시설 입지선정에는 항상 어려움이 따랐다. 웅진군 굴업도에 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을 건설하려고 할 때도, 부안군도 마찬가지였다. 환경운동가들이 유입되고 주민을 설득하며, 각종 행사에서 반대 목소리를 낸다. 극렬한 반대는 바른 정보 전달을 방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전략은 지금까지 나름의 성공을 거둔 듯싶다.
과거 원자력을 내몰았던 주민들이 과연 지금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대표적 사례가 부안군이다. 결국 방사성폐기물처분장 유치신청을 백지화하고 경주에 뺏기고 말았다. 부안군에 들어와 주민을 설득했던 외부 단체는 다들 떠나가 버렸고 결과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제주도는 정부가 우주기지를 건설하려고 했을 때 반대했고 결국 현재 고흥 외나로도에 건설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땅을 치고 후회하는 중이다. 좋은 관광시설이며 연구시설 유치였지만 군사기지라는 소문이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가져왔다.
우리나라에서 원자력발전소는 1977년 최초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반세기에 가깝게 운전됐지만 별 문제없이 가동됐다. 일부 언론을 장식한 사건이 있었지만 사건의 심각함 때문보다는 원자력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한 과도한 우려가 많았다. 결과가 모든 걸 증명하고 있다.
때로는 듣지 않고 보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 아래를 보지 말라고 해도 눈은 아래를 향한다. 아래를 보지 않는 데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는 영덕 주민들이 지혜를 발휘하리라 믿는다.
정범진 경희대 교수(원자력공학과) bjchung@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