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우리나라 산업계는 ‘개혁→세계화→위기’라는 깊은 굴곡을 맛봤다. “변화와 개혁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로 집권한 김 전 대통령은 임기 초반 경제·산업 구조 전반 선진화·세계화에 ‘올인’했다.
금융실명제도 이런 기조 속에 근본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대통령 신념속에서 나왔다.
산업계와는 미료한 긴장과 기싸움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재계 총수들과도 각별한 인연을 맺으며 경제·산업 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건희·故 정주영 회장과 깊은 인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김 전 대통령 문민정부 시절 첫 번째 사면·복권을 받은 인연을 가졌다. 이 회장은 지난 1996년 8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노 전 대통령에게 직무와 관련해 네 차례 걸쳐 100억원을 전달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면서 서울지법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 회장은 항소하지 않아 1심이 그대로 확정됐다.
이듬해인 1997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개천절을 맞아 이 회장 등 경제인 23명을 특별 사면·복권했다.
문민정부 초기 현대그룹은 정권으로부터 수난을 겪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집권 1년차인 1993년 비자금 조성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지면서부터다. 정 명예회장이 기소된 것은 제14대 대선에 출마해 여당 후보였던 김 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운 데 따른 보복성이란 설이 유력하게 나돌았다. 정 명예회장은 정계 은퇴까지 선언해야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 이후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사면복권됐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 때 정 명예회장을 청와대로 불러 “경제를 살리기 위해 사면한다”고 단서를 달 정도로 불편한 관계가 풀리지 않았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2001년 3월 정 명예회장이 타계하자 청운동 빈소를 직접 찾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게 “우리나라에서 대업을 이룬 분인데, 그런 족적을 남긴 분이 가시니 아쉽다”고 조문하면서 사후 화해했다.
◇‘규제 혁파’를 산업 선진화 첫 단계로 봐
우리나라 경제 규모가 날로 확대되고 산업구조가 고도화되면서 정부의 규제가 민간부문의 발목을 잡는다는 인식으로 규제개혁에 나섰다. 사실상 기업 규제 혁파를 정부정책 기조에 도입한 첫 대통령인 셈이다. 기업 창업이나 공장 입지, 자금조달, 시장진입 관련 행정 절차가 크게 간소화된 것도 이때다.
대외적으로는 임기 전반기 빠른 경제 성장과 적극적 시장개방을 바탕으로 1996년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정식 가입했다. 한국전쟁 폐허를 딛고 40여년만에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는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준비 덜된 조급한 개혁…화 부르기도
OECD 가입은 불과 1년 만에 김 전 대통령에게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OECD 가입에 탄력을 받아 경제개혁·개방 정책에 피치를 올렸지만 1997년 1월 재계 14위였던 한보그룹 계열사인 한보철강이 부도를 맞으면서 대기업 연쇄 부도 사태가 일었다. 같은 해 4월 삼미그룹이 부도를 낸 데 이어 7월 기아자동차 도산 사태까지 벌어졌다.
쌍방울그룹, 해태그룹이 위기를 맞았고 고려증권, 한라그룹이 차례로 쓰러졌다.
1997년 한 해 동안 부도를 낸 대기업의 금융권 여신만 30조원을 훌쩍 넘어서면서 나타난 신용 경색과 금융시장 혼란은 한국을 금융위기로 몰아갔다.
서거일 정확히 18년 전인 1997년 11월 22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故 김 전 대통령은 재임 5년간 경제부총리를 여섯 번이나 바꿔가며 ‘경제동력’을 살려보려 했으나 故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그 역할을 넘겨야 했다.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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