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이 못 쓴 건지 프랭크 다라본트가 못 만든 건지.
미스트(The Mist)는 명성에 비해 큰 실망을 안겨줬다. 두 사람은 ‘쇼생크 탈출’에서 작가와 감독으로 역사에 남을 명작을 찍어냈지만 미스트에선 영화 내용처럼 뿌연 안개 속에서 길을 헤맨다. 극단적 선택으로 막을 내리는 마지막 장면은 작가와 감독이 노린 극적인 효과는 조금도 거두지 못한 채 허무함만을 진하게 남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관객이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날 수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너무 많은 것을 담다보니 이도저도 아닌 영화가 돼버린 사례를 우리는 많이 안다. 감독이 작품성과 오락성 둘 사이에서 고민하는 건 좋지만, 그것이 작품에 드러나선 곤란하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남긴다. ‘그 좋은 소재 가지고 이거밖에 못만드나?’
이 영화에서 건질 게 하나 있다면 ‘과학에 대한 고마움’을 알게 해줬다는 것이다.
미스트의 상황설정은 훌륭하다. 호숫가 마을. 정체불명의 안개. 마트에 갇힌 사람들. 안개 속 보이지 않는 괴물. 괴물의 공격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나간다. 공포다. 인류가 수 세기 쌓아온 문명이 한순간 송두리째 뽑혀나간다. 의식의 양파껍질 제일 안쪽에 들어있는 ‘생존본능’이 고개를 든다. 그들은 어떻게든 이 상황이 설명되길 바란다.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안개와 정체 모를 괴물은 감당이 안된다. 나는 안전할 것이라는, 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확신도 얻고 싶어진다.
인간이 세상을 관리한다는 생각, 즉 이성은 설자리가 없다. 이제 초자연적 존재가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만약 그들이 빌딩 붕괴나 대지진 현장에 있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확률은 적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황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설명은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문명의 통제 하에 있다. 공포는 없다.
미스트에는 광신도 아줌마가 등장한다. 적절한 등장이다. 아줌마는 성경 구절을 읊어대며 사람들을 선동한다. 이 모든 것은 신이 분노한 탓이라며 희생양을 바쳐야 한다고 말한다. 아직 이성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 말려도 소용이 없다.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 장면을 보며 고대의 제사장이 떠올랐다. 제사와 정치권력을 한 손에 거머쥐었다는 그들. 모든 현상을 ‘신의 뜻’으로 설명하고 그에 거역하면 신의 이름으로 처벌한 사람들. 마녀사냥.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이것을 극복하기까지 인류는 얼마나 많은 현상을 과학의 이름으로 설명해 내야 했는가? 과학이 버티고 있지 않다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허황된 광신도의 말을 신봉할 것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우리는 ‘과학 과잉 시대’를 살며 과학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한 번쯤은 과학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중요한 뼈대임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
김용주기자 kyj@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