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팹리스 반도체 수십 곳이 반도체 전자설계자동화(EDA:Electronic Design Automation) 소프트웨어(SW)를 불법복제해 사용하다 적발된 것으로 드러났다. 연간 매출액 1000억원이 넘는 상장기업도 다수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단속을 벌인 EDA업체 시높시스는 불법복제를 지속해서 모니터링할 계획이다. 추가 적발도 예상된다. 우리나라 팹리스 생태계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정품 사용이 시급한 상황이다. 하지만 영세한 팹리스업체가 값비싼 정품 SW를 쓸 여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 EDA업체가 생태계 활성화 차원에서 지원도 병행해야 한다는 목소리 또한 높다.
16일 전자신문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시높시스는 지난해 국내 반도체 팹리스, 디자인하우스 업체 10여곳에 SW 불법 이용에 따른 법적 대응 방침을 전달했다. 이후 대부분 업체와 협상을 통해 신규 계약을 맺는 쪽으로 일단락했다.
시높시스코리아 관계자는 “지불 능력이 충분히 있는 업체가 설계 소프트웨어를 무단 사용하는 것을 본사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적발된 팹리스 업체 가운데 매출액이 가장 많은 S사는 대체로 적은 돈을 물었다. 시높시스 툴 사용 비중이 낮았다. 두 번째로 매출액이 많은 A사는 비싼 비용을 치렀다. 수십억원을 3년에 나눠 지불하는 방식으로 신규 제품 계약을 맺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 회사는 삼성전자에 디스플레이용 칩을 공급한다. 이 같은 사실이 삼성전자에 들어갈 경우 거래가 끊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전전긍긍하면서 협상을 진행했다.
최근 경영 사정이 악화된 I사와 근래 실적 부진으로 고생하던 T사는 인정에 호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디자인하우스 업체 몇 곳은 지불 능력이 없다며 버텼다. N사와 A사, H사는 이번 건이 터지자 고객사인 LG전자 시스템반도체(SiC) 연구소로 들어가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디자인하우스 P사의 경우 경쟁사 툴을 시높시스 툴로 변경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김진경 전자통신연구원(ETRI) 연구원은 “다른 SW에 비해 반도체 설계툴이 워낙 고가이다 보니 한 번 불법 단속에 걸리면 수억원은 기본으로 내야 한다”면서 “지난해부터 정품 사용을 권장하는 세미나를 네 차례나 실시하는 등 많은 기업에 직·간접 통로로 이 같은 사실을 알렸으나 아직도 상황을 모르는 회사가 많다”고 말했다.
팹리스 업계는 이번 일로 혹시 불똥이 튈까 우려하면서도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 팹리스 업체 대표는 “EDA 툴을 다 구비해 놓고 사업을 운영해 나가기가 쉽지 않다”면서 “특히 영세 업체는 EDA 툴을 정상 가격으로 구입할 만한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올해부터 중소 팹리스를 대상으로 제공해 오던 EDA 툴 지원 예산을 없앴다. 정부 보조를 받아 EDA 지원 사업을 추진해 온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산하 SW-SoC융합R&D센터는 예산이 끊기자 ‘공동구매’ 형태로 형식을 바꿨다. 팹리스 업계가 십시일반으로 지불해 사용해야 하는 만큼 부담이 늘어났다.
EDA는 반도체를 설계할 때 반드시 필요한 소프트웨어다. 세계 EDA 시장은 시높시스, 케이던스, 멘토그래픽스 3개 업체가 전체 시장점유율 98% 이상을 차지한다. 시높시스는 1위 업체다. 시높시스는 디지털반도체를 설계할 때 엔지니어가 텍스트로 짠 반도체 동작 소스코드를 실제 반도체 게이트 레벨 레이아웃으로 변경하는 툴과 타이밍 체크 분야 툴에서 강점이 있다. 지난해 이 회사 매출액은 22억4200만달러(약 2조7000억원)였다. 한국 시장 매출액 비중은 약 10% 수준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케이던스와 멘토그래픽스는 국내서 이처럼 대대적인 EDA 불법 이용 단속을 벌인 사례가 없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