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인 시대는 비극적인 개인을 낳는다. 1940년대는 일본어를 국어로 배우며 우리의 것을 잃어야 했던 시기다. 그리고 잘못된 욕망에 휩싸여 자신을 잃어갔던 비극적인 운명도 존재했다.
영화 ‘해어화(LOVE, LIES)’(감독 박흥진)는 1943년 비운의 시대, 가수를 꿈꿨던 마지막 기생의 숨겨진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소율(한효주 분)은 경성의 제일의 기생학교인 대성권번에서 빼어난 미모와 탁월한 창법으로 줄곧 1등을 도맡아 중요 인사를 모시는 최고 기생이다. 그는 비록 천한 신분이지만 학문과 예술을 아는 예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간다.
하지만 예인의 시대는 저물고 있었다. 대중가요의 태동기에 소율과 그의 둘도 없는 동무 연희(천우희 분)는 대중가요의 매력에 빠진다. 여기서 두 사람의 인생은 갈리는데, 연희는 기생이 아닌 대중가수를 꿈꾸고, 소율은 정가 명인으로서의 삶을 지키기로 한다.
서로 가는 방향이 달랐기에 소율과 연희는 서로의 앞날을 응원해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소율은 대중가요를 부르는 연희에게 난생 처음으로 칭찬을 빼앗기고, 결혼을 약속한 윤우(유연석 분)의 눈빛마저 연희를 향해있다는 것을 눈치 챈 후 혼란스러워한다. 심지어 소율 본인은 정조를 지키지 못하고 창녀가 될 뻔한 것과 달리, 연희는 모든 사람의 환호를 받자 질투에 사로잡힌다.
결국 소율은 자신이 가져야 했던 사랑을 되찾기 위해 대중가수를 꿈꾼다. 한효주는 순수한 소녀에서 파국으로 치닫는 소율 역을 맡아 생애 처음으로 악역에 도전했다. 모든 것을 잃고 괴로워하며, 자신마저 버리는 모습은 누구에게도 동정받기 힘들기 때문에 더욱 안쓰러움을 자아낸다. 특히 한효주는 할머니 분장을 하는 등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는데, 외견상 다소 어색할 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감정선을 잇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또한 천우희는 간드러지는 목소리와 변화무쌍한 무대로 관객들을 사로잡으며, 극중 캐릭터처럼 한효주에게 절대 밀리 않는 미모와 실력을 과시한다. 당대 최고의 작곡가 캐릭터로 분한 유연석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오직 피아노만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이처럼 ‘해어화’는 들을 거리, 볼거리가 많은 영화다. 한효주ㆍ천우희가 부르는 노래와 유연석의 피아노 연주는 배우들이 직접 부르고 연주했다는 것이 믿기 힘들 정도로 수준급 실력이고, 40년대 경성을 재현한 세트장과 고풍스러운 한복, 개성 있는 양장과 기모노 등 화려한 의상은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눈으로 한 번 보고, 귀로 한 번 느낄 수 있는 이 작품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관객들의 마음에 울림을 선사한다. 박흥진 감독은 시대적 아픔과 개인의 가치를 연결시켜 자신을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된다고 외치며, 소율의 인생이 비극적으로 끝나는 이유는 자신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3일 개봉.
이주희 leej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