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작으로 대박을 터뜨리는 스타들도 있지만, 장독대 깊숙한 곳의 묵은지처럼 조금 늦게 세상의 빛을 보는 스타들도 있다. 시작은 비록 미약했으나 오래 묵힌 이들의 향은 진하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 가장 튀는 캐릭터를 꼽으라면, 열에 아홉은 ‘납뜩이’라 말할 것이다. 영화의 흥행 이후 한동안 본명을 잃고 납뜩이로 불렸던 조정석은 수채화 같은 영화 속에서 3D와 같은 존재감을 뽐냈다. “어떡하지, 너?”라는 유행어를 남기며 대중의 기억 속에 깊은 발자국을 찍은 그는 이 작품으로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까지 받게 된다. 건축학개론’에 이어 ‘관상’에서는 내경(송강호 분)의 처남 팽헌 역을 맡아 개성 있는 연기를 선보이며 관객들에게 ‘조정석’이라는 세 글자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이후 ‘역린’ ‘나의 사랑 나의 신부’ ‘특종: 량첸살인기’를 거치며 충무로의 샛별에서 대세 배우로 차근차근 자신의 입지를 넓혀온 그는 오는 4월 13일 개봉을 앞둔 ‘시간이탈자’를 통해 조정석이란 이름에 또 하나의 색을 더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믿고 보는’ 배우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이성민이지만, 그의 이름만 듣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1985년 연극배우로 연기를 시작한 그는 손가락을 수십번 접었다 펴야될 만큼 많은 작품을 거쳤다. 지루하리만큼 긴 시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그의 연기가 대중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MBC 드라마 ‘골든타임’을 통해서다. 극 중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의사의 사명감으로 중증외상 환자를 수술하는 열혈 의사 최인혁 역을 맡았던 그는, 카리스마와 따뜻함을 동시에 지닌 최인혁을 완벽히 그려내며 연기인생의 ‘골든타임’을 맞이했다.
이후 케이블채널 tvN 드라마 ‘미생’을 통해 이성민은 갓성민으로 등극한다. 극 중 장그래(임시완 분)의 상사이자 멘토 오상식을 아주 자연스럽고 섬세하게 표현했다. 이성민은 퇴근길 지하철에서 마주하는 ‘중년남성1’과 같은 연기를 펼쳤다. 야근과 갖은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연기를 통해 이성민은 오 과장이 됐다.
만년 오 과장일 줄 알았던 이성민은, 최근 ‘기억’에서 인생 탄탄대로를 달리다 갑작스럽게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게 된 변호사 박태석으로 완벽 변신했다. 젊은 톱스타가 아닌 중년 배우가 선봉에 선 드라마의 힘은 당연하게도 ‘배우 이성민’이다.
2015년에 이어 2016년에도 조진웅은 달린다. 그것도 열심히. 지난 3월 종영한 케이블채널 tvN ‘시그널’에서 조진웅은 억울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미제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강력계 형사 이재한 역을 맡았다. 극 중 그의 죽음에 시청자들은 ‘이재한 살리기 운동’까지 벌였다. 조진웅의 연기는 죽은 이도 ‘살려야 하는’ 설득력을 지녔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김판호 역을 맡으며 비주얼만큼 무서운 연기력을 자랑한 그는, 이후 ‘명량’ ‘암살’ ‘끝까지 간다’ 등을 통해 대중들의 마음에 묵직하고 굵은 뿌리를 내렸다. 지난해 청룡영화상에서 ‘끝까지 간다’로 남우조연상을 받을 당시 “홍보할 때는 주연이라고 하더니 상은 조연상이냐”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조진웅은 이미 충무로에서 듬직한 주연 배우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올해도 조진웅의 전성시대는 계속된다. 영화 ‘아가씨’ ‘사냥’ ‘해빙’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고, 오는 7월에는 ‘보안관’이 크랭크인한다. 뿐만 아니라 tvN 새 드라마 ‘안투라지’ 출연까지 확정 지었다. 조진웅이라는 화산이 오래 끓다 터진 만큼 그 열기 또한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오랜 시간 내공을 다지고 단역에서 조연, 그리고 주연으로 발돋움하는 배우들의 성장기가 지속적으로 부각되어야 할 이유는 간단하다. 여전히 연기만을 바라보고 대학로 소극장에서, 영화 현장 한 구석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라보는 명품배우는 앞서 거론했듯이 데뷔작에서 갑자기 인기를 얻은 스타가 아닌, 연기력을 인정받아 서서히 대중들 속에 스며드는 선배들이다.
그리고 대중들 역시 이들의 성장기를 통해, 이들이 연기한 드라마 속 캐릭터를 보는 것 이상의 감동을 종종 얻곤 한다. 성장하는 명품 배우의 존재감이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진보연 기자 jinb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