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전기자동차 민간 보급 확산을 위해 충전인프라 확충에만 집중하고 있다. 당장 내년부터 1회 충전에 300㎞를 주파하는 전기차가 선보이고, 같은 크기의 배터리에 두 배 가까운 에너지를 담을 수 있는 배터리도 나온다. 충전인프라 정책은 1회 충전으로 140㎞를 달리는 수준에 묶여 있다. 지난달 제주를 찾은 세계 전기차 보급률 1위국 노르웨이의 스투레 포르트비크 오슬로시 친환경교통국장은 “제주 면적에 내연기관차를 전기차로 전부 교체한다고 하더라도 급속충전기 30~40기면 충분할 것”이라면서 “오슬로에는 2만대 넘는 전기차를 보급하기까지 급속충전기 없이 수백 곳의 노상주차 면에 구축한 완속충전기가 전부였다”고 설명했다. 오슬로는 섬이 아니라 장거리 운행 수요가 더 많았지만 전기차 보급과 급속충전기 수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우리나라 정부와 지자체의 `깔고 보자`식 전시행정의 일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수천기, 고철덩어리 될 수도
의구심은 `제주에 구축될 완·급속충전기 3만기를 다 쓸 수 있을까`에서 비롯됐다.
24일 제주도·전기차업계에 따르면 제주도, 산업통상자원부, 한국전력, 현대기아차, LG, KT 등이 2017년까지 제주 지역 공공시설물에 설치할 예정인 완·급속충전기는 2500기가 넘는다. 여기에 2017년까지 제주도가 보급하는 전기차 2만9000대와 같은 숫자의 가정용 완속충전기가 올해까지는 전액 무상, 내년엔 일부 보조금을 지급해 보급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 환경부 관계자는 “실 보급대수는 예산에 따라 다소 유동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오차가 있더라도 내년 말 2만~3만기 충전기는 깔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약 37만대 내연기관차가 쓰는 제주 내 약 200개 주유소 주유기 수와 비교해도 훨씬 많은 수다. 한 번 충전에 140㎞ 안팎을 주행하는 전기차와 500~600㎞ 이상을 달리는 내연기관차 간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3만대(2017년 말까지 예상) 전기차 시장을 고려하면 과도한 충전기 수다.
지난해 10월부터 3개월 동안 제주에 가동되고 있는 급속충전기 20기 사용량을 집계한 결과, 이 기간에 총 27만1318㎾h 전기가 사용됐다. 급속충전기 1기에 하루 평균 150㎾h 전기로 5.5대 전기차가 이용했다. 전기차 한 대에 최장 30분 충전시간을 감안하면 하루 이용시간은 3시간에 불과하다. 전기차 운전자 역시 충전인프라 부족에 따른 불편은 거의 느끼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에서 전기차를 운전하는 최 모씨는 “10개월 가까이 거의 매일 하루 평균 약 100㎞ 거리를 운행하고 있지만 급속충전기 사용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라면서 “사업장과 집에서 주차 때 충전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기차 사용자인 강 모씨는 “제주는 섬인 데다 교통체증 구간이 빤하기 때문에 주행거리 예측이 쉽고 이미 충전기가 많아서 충전기 걱정은 하지 않는다”면서 “전기차 운전자 가운데 충전기 고장을 우려하는 운전자는 있어도 (충전기) 부족 때문에 곤란해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전했다.
제주도 관계자는 “제주엔 매년 10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전기차 민간 공모에 참여한 도민 민원 대부분이 충전인프라 부족에 집중돼 어쩔 수 없이 충전기를 늘려야 하는 실정”이라면서 “올해까지는 계획된 인프라를 구축하고 내년부터는 수요를 고려해 추진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빠르게 진화 중인 전기차와 배터리
물리적으로 배터리 양 자체를 늘려서 1회 충전으로 300㎞ 이상 달리는 전기차가 늦어도 내년 초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2018년에는 기존 배터리 크기에 에너지양을 늘린 고밀도 배터리를 장착한 전기차도 나온다. 충전 인프라 의존도는 획기적으로 줄어들 것이 뻔하다.
올해 말 북미를 시작으로 글로벌 유력 전기차 제조사가 한 번 충전으로 300㎞ 이상을 달리는 전기차를 속속 내놓는다. 우리나라에도 내년 초 GM `볼트(BOLT)` 출시를 시작으로 닛산 `리프(Leaf)` 신형 모델, 테슬라 보급형 전기차 `모델3`가 줄줄이 나온다. 르노와 벤츠 등도 이미 검증된 장거리형 전기차 한국 출시를 검토하고 있다. 이들 차량은 모두 1회 충전 시 200~300㎞ 주행 거리에다 차량 가격도 기존 전기차와 비슷하다.
에너지 밀도를 향상시킨 배터리도 속속 등장한다. 삼성SDI은 기존 배터리 크기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한 번 충전으로 최대 600㎞를 달리는 고에너지 밀도 배터리셀 프로토타입을 개발해 완성차 업체와 공급 논의에 들어갔다. 삼성SDI 측은 ㎏당 에너지양은 자세히 밝힐 수 없지만 물리적으로 늘린 이전 배터리와 차원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아우디는 LG화학, 삼성SDI와 함께 한 번 충전에 500㎞ 이상 주행 가능한 고용량·고성능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를 2018년에 출시한다고 밝힌 바 있다.
전기차 전문가 박철완 박사는 “전기차 구입 때 가장 큰 고민이 한 번 충전에 따른 주행거리”라면서 “볼트, 모델3, 리프 신형은 배터리 용량을 늘렸을 뿐만 아니라 오랜 시장 경험으로 배터리 에너지 밀도나 구조설계 기술 등으로 주행 성능을 크게 높였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도 배터리 업체와 양극, 음극제, 전해질, 분리막 등 4대 소재 기업을 총동원해 전기차용 고밀도 이차전지 개발에 들어갔다. 27㎾h급 배터리를 장착한 전기차 기준으로 한 번 충전에 135~150㎞를 달리는 현재 기술을 300㎞까지 늘리겠다는 목표다. kg당 150㎾ 수준 이차전지 에너지 밀도를 2020년까지 300㎾h/kg로 높이고, 이 과정에서 개발된 배터리는 즉시 상용화된다. 우리나라와 함께 배터리 강국인 일본과 중국도 2020년까지 250㎾h/㎏ 수준 고밀도 배터리를 상용화할 계획이다.
박태준 전기차/배터리 전문기자 gaiu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