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우리나라 조선해양플랜트 3사 적자 규모는 약 8조원에 이른다. 올해 수주량은 목표 대비 0~20%에 불과해 내년도 최악의 상황을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업계는 이미 수천 명 인력을 감축했고 최근 또 다시 인력과 사업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조선해양플랜트 대기업 수주량에 이은 건조 물량 감소와 매출 하락, 적자 증가는 중소 기자재와 부품업체에 후폭풍으로 이어지고 있다. 직간접적으로 연계된 철강, 기계, 부품소재 등 다른 기간산업까지 흔들린다.
한때 잘나가던 조선산업을 배경으로 사업확장에 나선 해양플랜트가 조선업계 전체를 되레 망가뜨린 배경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했다.
◇무리한 일괄 수주로 적자 자초
우리나라 선박제조기술은 세계 최고다. 최근에는 설계까지 자체 능력으로 수행한다. 세계 조선시장에서 우리나라 조선사가 1위를 차지하지 못한 분야는 특수 시장인 대형 관광크루즈선 뿐이다. 10여년 전까지 지적돼 온 조선기자재와 부품 국산화율도 80%까지 달성했다.
고유가 시대에 맞춰 급부상한 해양플랜트는 조선3사에는 새로운 기회였다. 조선 1위 경쟁력을 해양플랜트산업으로 이어가야 한다는 여론도 높았다.
조선 3사는 국제 해양플랜트 수주에 경쟁적으로 뛰어 들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 건조 분야를 넘어 기획·설계와 운반 설치까지 해양플랜트 전 과정을 도맡아 하는 턴키 방식 일괄 수주는 가격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매력적 방법이었다.
세계 국영기업 및 오일메이저 등 플랜트 발주사 또한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다. 턴키 계약은 단계 또는 부문별 계약과 달리 총 공사금액 10~20%를 줄일 수 있었다.
국내 조선사는 해외 유명 엔지니어를 스카우트해 팀을 꾸리고 자체 기획과 설계, 시공 엔지니어링을 시도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잦은 설계 변경과 프로세스 혼선, 이로 인한 부품 기자재 수급 조절에 실패하며 납기 지연에 비용도 당초 예상을 크게 초과했다. 이익은 고사하고 건조 부문만 개별 수주했을 때와 비교해 손해가 훨씬 컸다.
건조 분야 외에는 뚜렷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해양플랜트 전 과정을 일괄 수주해 결과적으로 막대한 운영 손실을 입게 된 것이다.
기대했던 해외 영입 엔지니어는 작업 수행 과정에서 두 손을 들었다. 자체 보유한 설계SW 등 프로그램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국내 기업문화에 융화되지 못한 이유가 크다. 당시 조선사에 근무했던 한 국내 엔지니어는 “유명 엔지니어를 간부급 팀장으로 영입해 PM과 설계엔지니어링 팀을 꾸렸지만 잘 돌아가지 않았다. 팀장 위에는 프로젝트에 관여하는 임원이 여러 명 있었고, 국내 엔지니어와 외국인 팀장 간 소통도 쉽지 않았다. 해외 유명 엔지니어 한두 명을 영입해 자체적으로 기획 설계 엔지니어링을 수행하려는 시도는 안이한 판단이었다”고 말했다.
해양플랜트 설계·엔지니어링은 해양플랜트 구축 프로젝트에서 초기 기획과 상세 설계를 수행하는 핵심 중의 핵심 분야다. 정확하고 탄탄한 설계에서 안전하고 튼튼한 해양플랜트가 구축된다.
적재적소에 필요 부품과 기자재 수급은 물론이고 건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시행착오를 줄여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고기술이자 고부가가치 영역이다.
이를 담당하는 설계엔지니어는 수십만 종 부품과 모듈을 바다 위 또는 심해 상태에 최적화해 적용하고, 이를 도면으로 나타내 분석 평가한다. 기계에서 전기전자, 화학, 건축, 환경에너지와 정보통신기술(ICT) 등 연관 분야를 전문가 수준으로 알고 있어야 가능하다. 수십년 노하우를 축적한 몇몇 대형 엔지니어링 기업이 해양플랜트 설계엔지니어링 시장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다.
◇플랜트 살리려면 엔지니어링 기술 확보해야
이전까지 우리나라 조선 3사는 해양플랜트 구축 단계에서 건조 분야 일감만 수주했다. 설계 엔지니어링이 필요해도 해외 엔지니어링사에 의뢰해 해결했다. 그렇다보니 수조원대 해양플랜트를 건조해 납품해도 매출 볼륨만 컸을 뿐 상대적으로 수익성은 낮았다. 설계엔지니어링을 직접 수행해 수익성을 높이려 했던 무리한 수주가 현재 조선 3사 대규모 적자 시작점이다.
정부와 각종 기관 독자 설계엔지니어링 기술 확보 압박도 한몫했다. 해양플랜트가 미래라며 조선3사가 앞장서 엔지니어링 기술을 국산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국산 기자재 적용을 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내 해양플랜트산업 위기는 이 같은 설계엔지니어링 기술 중요성을 간과한 결과다.
현재 우리나라 조선해양산업은 선박시장은 이미 중국이 턱밑까지 추격해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상태다. 그렇다고 저유가 상황에서 해양플랜트를 앞세워 앞으로 치고 나가기도 어려운 진퇴양난의 기로에 서 있다.
전문가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현재 국내 해양플랜트산업 체질을 혁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건조 부문이 절대 비중을 차지하는 것에서 설계엔지니어링 기술과 역량 확보를 서둘러야 한다는 얘기다. 단기 성과에 치중하는 정책보다는 산업체질 개선을 위한 고급인력 양성, 핵심기술 개발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게 해양플랜트 산학계 공통된 요구다.
해양플랜트 업계 관계자는 “설계기술과 서비스, 특허를 하나로 결합한 브랜드 전략 추진과 동시에 국내에 경쟁력 있는 엔지니어링 기업을 발굴 육성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국제 저유가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해양플랜트 수요는 다시 촉발될 것이고, 산업에 대한 관심도 높아질 것이 분명하다. 바다 속 석유·가스 매장량은 지구 총 매장량 73%를 차지하고, 육상 에너지 자원은 언젠가 고갈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기만 남았을 뿐 해양플랜트 시장은 다시 급속 성장할 것으로 다수 전문가는 예상한다.
조효제 한국해양대 교수는 “세계 해양플랜트 시장은 고유가와 경기 회복에 이은 에너지 자원개발 활성화와 맞물려 다시 급속 성장할 것”이라며 “설계엔지니어링 기술 자립화 등 해양플랜트산업 육성을 시장 선도 단계를 넘어 국가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 조선해양, 2011년 이후 내리막
우리나라 조선해양산업은 2002년 처음으로 수출 100억 달러를 넘어선 후 연평균 20%씩 성장했다. 2011년에는 566억달러로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 5570억달러의 10%를 넘어선 사상 최고 실적을 거두기도 했다.
당시 수출 566억달러는 그리스(254억달러), 뉴질랜드(306억달러), 이집트(319억달러), 필리핀(491억달러) 총 수출액보다 많은 규모였다.
산업별 수출 비중은 1986년 이후 전체 수출액의 4~12%를 차지해 5대 수출품 자리를 지켰다. 2008~2011년에는 수출 품목 중 1위에 올랐다.
자료:산업부
최근 3년간 지속된 조선3사 대규모 적자는 외형상으로는 수주 부진에 따른 건조량(일감) 부족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앞서 지적한대로 기술력을 갖추지 못한 채 설계엔지니어링을 포함한 해양플랜트 구축 물량을 무리하게 수주했고, 이로 인해 막대한 운영 손실을 입었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2011년 국내 조선 3사 수주량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해양플랜트 수주량은 전체의 60%를 차지했다.
해양플랜트는 다양한 공학기술을 요구하는 대표적 융·복합 산업이다. 전후방 산업 연관효과가 크고, 기술적 파급효과도 막대하다. 철강, 조선, 기자재, 해운은 물론이고 IT, 전기, 전자, 철강, 화학 등 연관 산업 또한 다양하고 많다.
해양플랜트 1기를 기획 설계하고 각종 부품을 구입해 건조한 후 이를 바다 위에 설치하기까지, 그 과정과 기간은 어떤 육상 건축물보다 길고 복잡하다. 해양플랜트 구축 사업은 국가나 국영기업 또는 대형 오일 메이저에서 대형 프로젝트로 추진하기에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해양 종합건축예술로 불린다.
해양플랜트산업도 플랜트 생애주기에 따라 여러 단계로 나뉘고, 단계마다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해양 유정 탐사와 관련 활동에서 시작해 해당 해역에서 원유를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각종 구조물과 장비 설계, 설계내용을 바탕으로 건조·제작(플랫폼과 기자재), 플랜트를 건조 야드에서 바다로 보내는 운반, 해역의 정해진 위치에 설치, 더 이상 기능을 할 수 없게 된 구조물과 설비를 해체 철거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규모 해양플랜트를 수주할 당시 우리나라 조선사는 건조(제작) 분야를 제외한 탐사, 시추, 기본설계, 이송, 설치, 운영, 해체 등의 분야는 경쟁력이 떨어졌다.
부산=임동식기자 dsl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