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한국은행이 조선·해운 업종 구조조정 지원을 위해 12조원의 `실탄`을 투입한다. 국책은행 자본 확충 방법을 놓고 정부와 한은이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였지만 “시간이 없다”는 공감대로 극적인 합의점 도출이 이뤄졌다.
조선 3사는 10조3000억원 규모의 자구안과 정부, 한은이 마련한 12조원을 바탕으로 구조조정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자금 여력은 당장 위기에서 벗어나기에 충분해 보이지만 근본 문제 해결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민간 기업 구조조정에 결국 대규모 혈세를 투입하게 됐고, 이 과정에서 한은이 발권력을 동원했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구조조정 지원 위해 12조원 투입…실탄은 `충분`
정부는 지난 4월 `기업 구조조정추진현황과 향후계획`을 발표하며 국책은행 자본 확충 필요성을 공식으로 처음 밝혔다. 국책은행이 더 이상 한계기업에 투입할 자금이 없음을 시인한 것이다.
정부는 이번 계획을 발표하면서 “양호한 국책은행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본비율 등을 감안할 때 구조조정 추진에 당장은 문제가 없다”면서도 “엄정한 구조조정 추진을 위해서는 국책은행 자본손실 상황에 대한 충분한 대응 수단을 강구해 둘 필요가 있다”고 배경을 밝혔다.
그동안 정부와 한은은 자본 확충 방안을 두고 의견차를 보였다. 정부는 한은의 발권력 동원을 주장했지만 한은은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지급 보증과 대출금 조기 회수 방안이 필요하다고 맞섰다. 평행선을 달리던 정부와 한은은 구조조정 지원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로 11조원 규모의 자본확충펀드 마련에 합의했다. 이번 발표는 당초 계획보다 20여일 앞당겨진 것이다.
정부는 산업은행은 BIS 비율 13%, 수출입은행은 10.5%을 충족해야 한다는 전제로 필요 자금을 산정해 5조~8조원을 도출했다. 논란이 돼 온 간접출자 문제는 11조원 규모의 `국책은행자본확충펀드` 조성으로 풀었다. 주요 재원은 한은 대출(10조원 한도)이다. 기업은행은 자산관리공사 후순위대출(1조원 한도) 형태로 재원 조성에 참여한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시나리오상 5조~8조원이면 충분하다고 봤지만 완전하고 충실한 방어막을 만들자는 의미로 11조원 규모로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자본확충펀드는 자산관리공사가 설립한다.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이 발행하는 조건부자본증권(코코본드)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돕는다. 코코본드는 은행 등 발행회사 자본비율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거나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등의 이유가 발생하면 원리금이 주식으로 자동 전환되거나 상각되는 채권이다. 한은 대출금 재대출은 대출금 손실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을 받게 된다.
이와 별도로 정부는 9월 말까지 수은에 1조원을 현물 출자한다. 내년도 예산에 산은·수은 출자 소요를 반영할 방침이다.
◇위기탈출 발판 마련했지만…혈세투입·발권력 동원 `한계`
3개 조선사는 총 10조3000억원 규모의 강도 높은 자구안을 마련했다. 현대중공업 3사(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 포함)는 비핵심자산 매각, 경영합리화, 사업조정 등으로 3조5000억원을 확보한다. 삼성중공업은 비생산자산 매각, 수주 목표 축소에 따른 잉여 생산 설비 및 인력 감축 등으로 1조5000억원을 마련한다. 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경영정상화 방안에 포함된 1조8500억원 자구계획과 별도로 3조5000억원 규모 추가 자구계획을 제출했다.
해운사들도 구조조정에 의미 있는 진전을 보이고 있다. 현대상선은 채권단의 조건부 채무조정안, 사채권자 채무조정안이 나왔다. 용선료 협상도 이번 주에 마무리될 예정이다. 한진해운은 지난 달 채권단 조건부 자율협약을 개시, 22개 선주사와 용선료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사채권자 채무조정을 위한 집회도 추진한다.
기업별 자구안과 정부·한은 자금을 바탕으로 조선 3사와 해운사는 튼튼한 구조조정 발판을 마련했다. 채권단도 조선 3사 자구계획에 각각 충분한 수준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뼈를 깎는 과정`은 이제부터라는 지적이다. 자산 매각, 인력 감축 과정에서 적지 않은 마찰이 예상된다. 합병·분할 없이 자체 구조조정으로 근본 쇄신이 가능할지 우려도 나온다.
정부의 구조조정 지원 방법을 두고도 지적이 나온다. 민간기업 구조조정에 혈세를 투입한다는 지적을 피하기 힘들다. 조선, 해운사 경영 실패와 국책은행 방만 경영에 따른 손실을 결국 국민 부담으로 메우는 셈이기 때문이다.
한은이 대출 방식으로 자본확충펀드에 참여하는 것도 결국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내는 발권력에 의존한 것이다. 손실이 발생했을 때 부담 역시 국민이 지게 된다.
정부는 이번 구조조정이 경제 전반에 미칠 영향이 크고 시급한 사안인 만큼 세금 투입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이해당사자의 고통 분담, 국책은행의 철저한 자구계획 선행 등으로 국민 부담을 최소화한다는 원칙을 밝혔다.
여야 3당은 구조조정에 재정을 투입하더라도 부실을 초래한 관련자의 책임 소재를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는 지난 7일 “구조조정을 하기 전에 (부실기업에 대한)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국책은행 쇄신안이 충분한 수준인지도 의문이다. 연봉 삭감, 인력 감축, 기능 재편이 방만 경영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을지 지적이 나온다. 9월까지 마련하기로 한 근본 쇄신안에 어떤 내용이 담길 지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임 위원장은 “산은과 수은의 자구계획 노력에는 임금과 조직, 예산 등이 광범위하게 포함된다”면서 “9월까지 전반에 걸친 조직, 기관 평가를 거쳐 쇄신 방안을 별도로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유선일 경제정책 기자 ys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