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기 본좌’, 연기 실력으로는 이견이 없는 배우 김명민의 수식어다. 그가 이런 수식어를 달 수 있었던 이유는 한계를 뛰어넘고 싶어 하는 욕심과 작품에 대한 신중한 고민 때문이다. 이런 연기 철학이 영화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에도 담겼다.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는 세간을 뒤흔든 대해제철 며느리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두고 브로커와 변호사 콤비가 수사에 나서는 영화로, 김명민은 전직 경찰이자 현재는 변호사(성동일 분) 사무실에서 일하는 업계 최고의 브로커 필재 역을 맡았다.
그동안 김명민은 굵직한 작품에서 개성 있는 캐릭터를 맡아 왔다. 때문에 대중에게 익숙한 배우지만, 사실 다작을 하는 배우는 아니다. 그나마 지난해와 올해, 긴 호흡의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오랫동안 모습을 내비췄고, 1년 4개월 만에 스크린에 컴백하며 대중을 만나고 있다. 그가 작품을 선택하는데 가장 신경 쓰는 조건은 ‘재미있는 캐릭터’와 ‘나만이 할 수 있는 캐릭터’다.
“내 마음을 동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작품에서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재료가 많은 캐릭터가 좋다. 요리사 입장에서는 열댓 가지 재료가 있을 때 여러 종류의 요리를 만들 수 있다. 서너 가지만 있으면 보여줄 것이 한계가 있다. 결과물이 뻔한 것은 싫다. 복잡하고 다중적인 캐릭터를 좋아하는데, 내가 맡은 필재는 다혈질 형사부터 속물근성의 브로커가 되는 과정을 그리면서 미묘하게 감정들이 변한다. 왜 필재가 속물이 됐는지 인생의 전 후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가면서 상상하는 것도 재밌었다. 다만 이 영화는 필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 캐릭터들의 관계성이 중요한 영화이기 때문에 적절하게 편집이 들어갔다.”
김명민의 말처럼 필재는 자신의 이익만 쫓던 인물에서 인간미가 살짝 엿보이는 사람으로 변한다. 이 부분은 영화의 터닝 포인트로, 중요한 신이다. 정의롭지 않은 캐릭터가 정의를 구현한다면 그 과정이 충분히 설명돼야지 관객들을 설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동현(김향기 분)에게 접근하는데, 나중엔 진심으로 동현을 도와준다. 앞뒤를 정확하게 구분하기 위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전까지는 필재의 속물근성을 확실하게 보여주려고 했다. 중국 요리를 먹는 신에서 동현이가 도와달라고 찾아오는데 거절한다. 여기서 어쭙잖게 복선을 까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필재라면 거절하는 게 맞는 것이다. 나는 뒷이야기를 알고 있지만, 미리 티를 내면서 연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나중에 동현이가 친구 엄마에게 욕을 먹는데, 필재가 진심으로 화를 낸다. 동변상련의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명민이 작품을 선택하는 또 하나의 조건은 ‘드라마가 우선인 작품’이다. 연기를 위해서는 어떤 것과도 타협할 수 있지만, 드라마가 받쳐주지 않는 목적 없는 행위는 싫은 것이다.
“어떤 연기든, 심지어 노출신이 있다고 해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뭘 위한 노출이냐가 중요하다. 꼭 필요한 신이어야 하고, 보여주기 식은 싫다. 액션 영화도 제안이 들어오는 편인데, 그것도 드라마가 먼저 우선이다. 구성이 탄탄하고 액션이 많이 필요하면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주구장창 액션을 보여주기 위한 액션은 안 된다. 나보다 몸 좋고 더 젊고 생생한 친구들도 있는데 굳이 내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김명민은 20년 동안 연기 생활을 하면서 늘 신선한 캐릭터로 우리 앞에 서고 있다. 직업도, 처한 입장도 다양했다. 의사, 형사부터 루게릭 환자, 페이스 메이커, 그리고 사극에서는 이순신, 정도전 등 연기자라면 한 번 쯤 욕심날 만한 역할들이다. 다음번엔 그가 그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남자의 3대 로망은 다 해본 것 같다. 올 겨울쯤 개봉할 영화 ‘판도라’에서는 대통령을 했고, 마에스트로와 장군 역할도 해봤다. 요새는 다중인격 역할을 한 번 해보고 싶다. 평소에 심리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연기를 한다면 표현할 것이 많은 것 같다. 사람의 심리는 단면적인 것이 아니라 그 밑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것이지 않나. 그 밑에 또 뭐가 있는지 궁금증을 준다. 보통 사람들의 겉면만 보는데 내면을 아는 순간 충격을 받기도 한다. 그런 충격을 영화가 상영하는 2시간 동안 보여준다면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재미를 주지 않을까 싶다. 연기를 하는 나도 재밌을 것 같다.”
“차기작은 영화 ‘원데이’다. 6월 중순부터 촬영에 들어간다. ‘조선명탐정3’은 내년 쯤 제작될 것 같다. 드라마는 끝난 지 얼마 안됐고, 자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웃음) 너무 자주 나오면 식상하지 않을까. 체력을 다지고 퀄리티 있는 작품으로 인사드리겠다.”
이주희 기자 leej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