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온뉴스 이주희 기자] 요즘 세상은 청춘들에게 너무나 쉽게 ‘꿈이 뭐냐’고 묻는다. ‘꿈이 없어요’ ‘잠시 쉴래요’라고 대답하면, 한심한 눈초리와 함께 돌을 던진다. 요즘 세상의 청춘에게 ‘꿈’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로 비쳐지고 있다.
영화 ‘걷기왕’은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야 한다고 채찍질하는 요즘 현실에게 ‘그만 하라’고 말해주는 작품이다.
17세 여고생 만복이(심은경 분)는 ‘선천적 멀미증후군’으로 어떤 교통수단이든 타면 멀미를 한다. 처음부터 타는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어릴 적엔 자전거부터 경운기까지 모든 것을 타 보았지만 ‘토쟁이’란 별명만 얻었다. 좋아하는 오빠(이재진 분)의 오토바이를 타기 위해 꾹 참아 보기도 하지만, 여지없이 눈을 까뒤집고 토를 하고 만다. 원인도 해결방법도 없는 선천적인 병이지만, 어른들은 이를 정신력 문제라며 열정만 있다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한다.
다만 만복이는 이 희한한 병 때문에 남들이 봤을 때는 쓸데없어 보이는 재주를 갖게 된다. 그것은 바로 왕복 4시간인 학교도 매일 걸어 다닐 수 있는 씩씩함이다. 이를 눈여겨 본 담임선생님(김새벽 분)은 만복에게 경보를 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한다.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꿈과 열정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설정했더니, 이 영화의 최대 악역은 담임선생님이 됐다. 그는 만복에게 자기계발서를 들이밀며 열정과 간절함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물론 큰 꿈이 없어도 되는 것처럼, 이 영화는 큰 갈등이나 큰 악역 없이도 둥글게 굴러간다.
청춘은 불안하기에 남의 말에 쉽게 흔들린다. 이어 단짝(김지원 분)마저 공무원이 되겠다며 열정적으로 공부하자 만복이는 불안해진다. 다들 뭔가 될 것 같은데 본인만 아무 것도 안 될 것 같다. 그래서 만복이는 육상부에 들어가고, 뭔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만복이를 보며 육상부 에이스 선배 수지(박주희 분)는 그를 ‘의지도 없고 쓸모도 없는 애’ ‘다들 목숨 거는데, 너만 장난이다’라며 천덕꾸러기 취급을 한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한 만복은 제대로 경보를 해보기로 한다. 하지만 열심히 해도 문제다. 수지나 만복이나 자신들이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일을 좋아서 하는 건지, 아니면 그만두는 게 무서워서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만복은 자의 반, 타의 반 전국체전에 나가게 된다. 처음으로 순위가 결정되는 경쟁에 뛰어든 만복에게 사람들은 다들 열심히 하라고, 넘어졌을 땐 빨리 일어나라고 아우성이다. 그러다가 문득, 만복은 “나 왜 이렇게 빨리 달렸을까” “조금 늦어도 괜찮을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감독의 이야기를 직접 이야기 하는 인물은 유일하게 만복의 삶을 응원하는 육상부 코치(허정도 분)다. 그는 “육상에는 코스가 있지만, 인생에는 코스가 없다. 그러니까 아이들을 거친 광야에서 헤맬 수 있도록 내버려둬야 한다”고 말한다.
‘걷기왕’은 청춘에게 꿈을 가지라고 이야기 해주는 그저 그런 청춘 영화가 아니다. 열정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청춘을 위한 일이 아니며, 넘어져도 실패가 아니라는 것, 넘어져서 쉬는 것도 본인의 의지라는 것이다. 감독은 ‘청춘이니까 더 열심히 뛰어!’라는 충고가 아닌 ’힘들면 언제든 걸어도 좋아‘라는 응원을 해준다.
‘걷기왕’은 제목도, 주인공 이름도 비슷한 영화 ‘족구왕’이 겹쳐 보인다. ‘족구왕’에는 남들이 뭐라 하든 말든 족구밖에 모르는 만섭이(안재홍 분)가 있다. 순수한 만복이와 만섭이는 쓸데없어 보이는 것에 도전하기에 ‘바보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느리고 잠시 쉬어갈 뿐, 자신의 속도에 맞게 걸어가고 있다.
‘족구왕’이 떠오르는 이유는 내용적인 요소도 있지만, 이 영화에 안재홍이 내레이션을 맡았기 때문도 있다. 안재홍은 만복이가 집에서 키우는 소 ‘소순이’의 목소리 연기를 맡았는데, 느릿하고 순박한 그의 목소리는 영화 전체에 사랑스러움을 더한다. 특히 만복이가 그를 “소순아”라고 부르면 “난 수컷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해 관객을 폭소케 한다.
이외에도 영화에는 감독의 센스가 여기저기 묻어나 있다. 자막을 비롯해 소품, 엑스트라 하나 하나까지 신경 썼다. 담임선생님이 들고 나오는 자기계발서에는 독립영화 감독으로 유명한 윤성호 감독이 표지를 장식한다든가, 만복의 육상부 라이벌로는 핑크색 하트 핀을 꼽은 하늬와 똑단발을 한 나예리가 등장하며, 리코더로 ‘타이타닉’ 주제곡을 엉망진창으로 불어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또한 애니메이션 감독 출신답게 오프닝을 애니메이션화해 아기자기하게 만들었고, 엔딩에는 “영화는 재밌게 잘 보셨나요. 다음에 또 다시 만나요”라는 가사의 노래를 심은경이 불러 관객과 직접 인사를 한다. 오는 20일 개봉.
전자신문 엔터온뉴스 이주희 기자 leejh@entero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