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 각국 중 날마다 향상되어 당할 수 없이 부강해지는 나라는 다른 것이 있는 게 아니라 격치(格致)하는 학문에 종사해 사물의 심오함을 구해(求解)하여 하는 바가 정밀하여도 더욱 그 정밀함을 구하고 기계가 이미 공교하여도 더욱 새로운 것을 내어 놓는데 지나지 않는지라. 국가의 요무(要務)가 어찌 이보다 앞서는 것이 있겠는가?”
1897년 대한제국을 수립한 고종황제는 1899년 관립상공학교 관제를 마련하면서 이같은 조칙을 내렸다. 과학기술과 기술개발이 가장 중요하다는 고종황제의 절박함이 묻어나는 글이다. 상공학교 관제는 공업과와 상업과로 나뉘어 예과 1년과 본과 3년으로 구성됐으며 졸업하면 기술 분야에 우선 채용되는 혜택을 누렸다. 이듬해 광무학교, 한성직조학교, 철도학교, 낙영학교 같은 근대 과학기술학교가 설립되어 과학기술인력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배로 우리나라가 주도적으로 근대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기회는 봉쇄됐다. 해방, 그리고 격동의 시기를 보낸 후 1960년대 후반 들어 비로소 선진 과학기술 도입에 눈을 돌리게 된다.
박정희 정권은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를 설립하면서 해외 한국과학자 유치 사업을 벌인다. 유치 과학자들은 정부 경제개발계획에 맞춰 국가 과학기술 연구개발체제 틀을 잡고 한국 과학기술을 불과 30~40년만에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현재 한국 과학기술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따라잡기` 전략으로 실속을 봤지만 혁신적 기술로 앞서가는 선진국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과학 논문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지만 획기적 돌파구를 여는 성과는 여전히 드물다. 국가적 난관을 헤쳐나갈 사회발전 동력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다.
성공신화를 뒷받침했던 성장 패러다임은 이제 변화가 시급하다. 새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 한국 과학기술의 근본적 전환을 모색해야 할 엄중한 시점을 맞이하고 있다.
한국 과학기술 위기의 원인으로 자주 지적되는 것이 `기초역량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한국의 과학기술은 허약한 기초 위에 세워진 탓에 더 높은 첨탑을 쌓기가 어렵다. 기초역량은 그저 열심히 한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과학기술 활동의 가장 필수적 기본 요소인 과학적 흥미, 열정, 도전조차 위축되거나 퇴색되고 있다. 이처럼 과학기술의 생명력과 역동성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에서는 과학기술 역량 강화는 헛구호에 불과하다. 기초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기초역량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성되는 것인지 따져 봐야 한다. 이 책은 기초역량과 관련된 것을 조목조목 거론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가 설립 50주년을 맞아 우리 과학기술 위기를 성찰하고 내일을 설계하는 내용을 담았다. 한국 과학기술 변화를 이끌 주축인 젊은 세대가 과학의 미래를 모색하는데 도움이 될 안내서다. 한국 과학기술계 문제를 개인, 사회, 세계의 3부로 구성해 살폈다. 허두영 외 지음, 들녁 펴냄, 1만7000원.
권상희기자 shkwo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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