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벽에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그림이나 문자로 표현하는 `그래피티`는 단순한 낙서를 넘어 거리예술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래피티를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최근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한복 입은 흑인소녀`는 한국인 그래피티 라이터 심찬양 씨 작품이다. 그의 스케줄 때문에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됐다.
-자기 소개 바란다.
▲서울에서 `Royal Dog`이라는 태그네임 그래피티 라이터로 활동하는 28살 심찬양이다.
-미국에서 작업한 그래피티가 화제다. 어떻게 미국에서 그래피티를 그리게 됐는지 궁금하다.
▲원래 하던 그림을 포기하고 필리핀에서 다른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다시 그림을 시작하고 싶어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호주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전업으로는 처음 그래피티 라이터 활동을 시작했다.1년 조금 넘게 서호주 퍼스에서 그림을 그리다 본토인 미국으로 가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그래피티 라이터로 살아가는 것은 무리라고 여겼다. 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아르바이트로 미국에 갈 돈을 모았다. 우연히 전시 제안이 들어와서 기획전으로 개인전을 가졌고, 그 수익으로 바로 티켓을 사 1년 7개월 만에 미국으로 갔다.
미국은 그래피티가 처음 시작된 곳이고 만약 내가 그래피티라는 문화의 현실에 실망해서 그만둔다할지라도 본토에서 실망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꿈꾸던 만큼이나 미국 활동은 좋았고, 계속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롱스에서 만난 1세대 그래피티 라이터 중 한명이 “그래피티는 우리가 도망 다니면서 길에다가, 기차에다가 그렸던 그림이다. 지구 반대편까지 건너가 다시 발전이 되고, 그들만의 맛을 첨가해 다시 이렇게 우리에게 가져다주니 너무 감격스럽고 고맙다”라고 말하더라. 그 일을 계기로 자신감도 더욱 가졌고, 한국 것을 그리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가는 곳은 거의 흑인이 사는 동네였고, 제게 음악과 그림을 선물해준 흑인들에게 저도 뭔가 선물을 주고 싶었다. 한국인으로서 내가 줄 수 있는 것 중 `한복`이 먼저 떠올랐다.
미국인은 동양 물건이나 문화에 관심이 많고 신비롭게 생각한다. 자신 있게 한복과 한글을 흑인에게 선물했다. 그림이 미국 흑인들의 마음을 조금 흔들어 놓았던 것 같다.
-그래피티 매력이 무엇인가.
▲가장 큰 매력은 `공격성`이다. 출근길 혹은 하교 길에 골목을 끼고 도는 순간, 다짜고짜 뺨을 맞은 듯이 예상치 못한 큰 그림이 허락도 없이 내 삶에 침범한다. 보는 이에게는 갑자기 받은 선물이 될 수도 있고, 그리는 이에게는 남 눈치를 보지도, 동의를 구하거나 타협하지도 않은 그림을 `공공의 공간`에 남긴다는 것이 큰 재미다.
이 그림은 누군가 떼어갈 수도 없고 한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왕이라고 해도 제 발로 오지 않고는 직접 볼 수 없다.
-전공이 만화였다고 들었다. 만화가 아닌 그래피티를 하게 된 계기가 있나.
▲만화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그렸고, 한 번도 변한 적 없는 꿈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 `힙합`이라는 만화를 통해 비보잉을 처음 알았다. 고학년 때엔 밤마다 혼자 그림을 그리다 보니 라디오를 자연스럽게 틀어놓았는데, 그때 힙합음악을 처음 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힙합문화를 동경했다.
시간이 지나 예고에 진학하고 계속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전공으로 공부했다. 3학년 입시를 한창 준비하던 시절에 잊고 지냈던 `그래피티`라는 단어가 우연히도 주변에서 많이 들렸다. 운명 같은 마음에 앞뒤 안 가리고 그래피티에 뛰어들었다.
-20대 취업준비생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필리핀에서 다른 공부를 하다가 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을 때 많은 고민이 됐다. 지금 그림을 그려 언제쯤 앞가림을 하게 될까, 부모님이 얼마나 실망 하실까, 이 결정을 후회하게 되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치킨 다리는 식기 전에 먹자`라는 말을 자주 한다. 식으면 다 맛없다. 나중에 먹어야지 하고 아끼면 제일 맛있는 때 맛있는 부위도 놓친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가장 즐겁게, 또 잘 할 수 있는 지금 당장 하자.
하고나서 하는 후회는 반성의 계기로 삼고 다음 번에 돌이켜 더 잘 하게 될 수도 있다. 안하고 나서 하는 후회는 평생 미련이 남아 다른 일에도 집중을 못하게 만든다. 내가 `콩알탄`인지 `다이너마이트`인지는 불을 붙여보기 전에는 모른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가 만들어진 이유는 아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걱정이 많겠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행복할 만큼 그 일을 사랑한다면, 그 용기는 곧 충분한 가치가 있다. 나중에 가서도 나에게 사랑을 돌려준다. 내가 행복할 것 같다는데, 뭘 더 망설일 필요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