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붕괴된 의료전달체계, 대형병원 쏠림 `속수무책`

[이슈분석]붕괴된 의료전달체계, 대형병원 쏠림 `속수무책`

수용 가능성(acceptable), 접근 가능성(accessible), 비용 부담 가능성(affordable), 활용 가능성(available). 세계보건기구(WHO)가 규정한 의료 서비스의 정의다. 네 가지 가능성을 토대로 공급자로부터 소비자에게 유효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의료 전달 체계의 핵심이다. 의료 자원 이용의 효율성을 위해 마련한 체계는 동네 의원부터 대학병원까지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무너진 지 오래다. 환자는 불편을 감수하고 대학병원으로 몰리면서 우리나라 의료 산업 전반을 위협한다.

의료 전달 체계는 의료기관의 규모를 나눠 환자 질환 경중에 따라 수준별 진료나 치료를 제공하는 시스템이다. 단순진료·건강상담·만성질환관리 등은 1차 의료기관이 전담하고, 중증질환이나 전문 치료 및 입원이 필요하면 2차 의료기관인 종합병원이 맡는다. 희소난치성 질환은 3차 의료기관(상급종합병원)으로 이송한다. 상급종합병원은 치료를 마치고 건강관리가 필요한 환자를 다시 1차 의료기관으로 돌려보내는 선순환 구조다. 제한된 의료 자원의 효율 사용, 수준별 의료서비스 제공, 의료 이용 형평성 확보, 병원 간 공정 경쟁 측면에서 의료 산업 구조를 지탱할 핵심 시스템으로 꼽힌다.

◇감기만 걸려도 종합병원행, 동네의원은 `텅텅`

우리나라 의료법은 병상과 진료과목 기준에 따라 의원급(병상 30개 미만), 병원급(병상 30~100개 미만), 종합병원(병상 100~300개 미만, 진료과목 7개 이상), 상급종합병원(병상 300개 이상, 진료과목 20개 이상) 등으로 나눈다. 이를 기준으로 1차(의원·병원급), 2차(종합병원), 3차(상급종합병원)으로 분류해 의료 전달 체계를 구축한다.

의료 자원의 효율 배분, 공정한 의료 산업 구조 구축 등이 목적인 의료 전달 체계는 유명무실한 상황이다. 감기만 걸려도 종합병원을 찾는 환자들로 대형 병원은 발 디딜 틈이 없고, 동네 의원은 폐업이 속출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의료전달체계에서 1차 의료 활성화를 위한 방안과 전망`에 따르면 2014년 기준 단순 고혈압, 감기, 소화불량 등 52개 경증 질환 환자 14.2%가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에서 진료를 받았다. 동네 의원에서도 충분히 진료가 가능하지만 규모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는 말이다.

상급종합병원의 외래 진료비 점유율은 2005년 13.29%에서 2014년 17.55%로 증가했다. 의원은 같은 기간에 65.46%에서 55.41%로 오히려 감소했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외래 진료비 연평균 증가율 역시 상급종합병원은 8.05%를 기록했지만 의원은 5.24%에 그쳤다. 모두 수도권에 위치한 상위 5개 상급종합병원은 전체 진료비 7%, 상급종합병원 진료비에서는 33%를 각각 차지하는 등 쏠림 현상을 가중시킨다.

◇병원산업 `과다경쟁`, 본연 임무 망각 환자 유치만 몰두

의료 전달 체계 붕괴는 민간 중심의 의료 서비스 공급 과잉이 유발한 과다 경쟁이 원인이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정부는 신속한 의료 보장 체계 구축을 위해 민간 중심의 의료 인프라 구축을 추진했다. 지불 보상 제도를 마련하면서 `행위별 수가제도`를 도입, `박리다매`식 진료 환경을 만들었다. 민간 중심 의료 서비스의 외형 팽창과 시장경제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상황에서 의료 전달 체계의 운영은 쉽지 않다.

임준 가천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근대 의학은 병원 간 경쟁이 핵심인 시장 체제에 근간을 두는데 의료 전달 체계는 이를 부정하는 것”이라면서 “광복 이후 우리나라 보건의료 체계 구축에서 정부가 민간에 많은 영역을 맡긴 데 따른 영향이 크다”고 지적했다.

오랜 시장 논리로 의원과 종합병원이 환자 유치를 두고 경쟁하는 상황까지 연출된다. 만성 질환 관리나 2~3차 병원 이송을 전제로 한 외래 진료가 제 역할인 동네 의원이 검사, 치료 등 2차 병원 역할까지 나선다. 3차 의료기관 역시 만성 질환 관리, 단순 진료 등 1차 의료기관의 환자 유치에 몰두했다. 경쟁 우위를 위한 고가 장비, 병원 시설 투자까지 불붙으면서 국가 건강보험 재정 악화, 환자 비용 부담 증가 등으로 이어진다. 실제 컴퓨터단층촬영(CT)이나 자기공명영상(MRI) 기기 30% 가까이가 의원급이 보유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2006~2010년 CT당 촬영 횟수는 연평균 19.4% 증가했다. MRI와 PET 역시 각각 연평균 10.5%, 25.2% 증가했다.

◇의료전달체계 선순환 구조…동네병원에 달렸다

정부는 의료 전달 체계 정립을 위해 패널티와 인센티브를 동시에 제공한다. 1차 의료기관 의뢰서 없이 3차 의료기관의 진료를 받을 경우 개인이 모든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3차 의료기관이 예후가 좋은 환자를 1차 의료기관으로 돌려보낼 경우 `회송 수가`도 지불하는 시범 사업을 하고 있다.

정부가 제시한 당근과 채찍은 단기 처방용이다. 의료 전달 체계 정립은 1차 의료기관이 `열쇠`를 쥐고 있다. 현재 1차 의료기관도 3차 의료기관처럼 처방과 치료에 집중한다. 동네 의원에서 진료가 아닌 치료에 몰두하면서 환자 만족도는 떨어진다. 같은 역할을 하는 3차 의료기관에 몰릴 수밖에 없다. 수술, 입원 환자에게 신경 써야 할 상급종합병원은 몰려드는 외래 환자로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1차 의료기관이 만성 질환 관리와 건강 상담 등 예방의학 서비스 제공 기관으로 재탄생돼야 한다. 대형 병원과 경쟁이 아닌 연계가 핵심이다. 지난해 기준 65세 이상 진료비는 22조2361억원으로 전년 대비 11.4% 증가했다. 고령화로 인한 만성 질환 관리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는 상황에서 1차 의료기관은 만성 질환 관리의 `문지기` 역할이 가능하다.

임 교수는 “1차 의료기관에서 진료, 검사, 치료까지 다 하려고 하다 보니 의료비 지출은 늘어나고 환자 만족도는 떨어져서 비효율성이 발생한다”면서 “건강관리, 상담, 진료 등에 집중하는 환경 구축이 근본 해결책”이라고 강조했다.

1차 의료기관 스스로 체질 개선을 강요하는 것은 생존을 위협한다. 정부 지원 방안이 절실하다. 만성 질환 등 대면 진료 시간 강화를 위한 교육 상담과 예방 서비스 급여, 상대 가치 수가 제도 도입, 1차 의료 활성화를 위한 장기 전략 마련 등이 제시된다.

정부가 추진하는 만성 질환 관리 시범 사업도 기회다. 보건복지부는 9월부터 전국 의원 1870개를 선정, 만성 질환 관리 수가 시범 사업을 하고 있다. 지역 내 고혈압, 당뇨 환자를 선별해서 `동네 주치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철희 분당서울대병원 교수는 “현대 진료는 급성 질환 치료에서 만성 질환 관리로 패러다임이 전환됐다”면서 “1차 의료기관이 정부 지원 등으로 만성 질환 관리 1차 관문 역할을 하고 대형 병원과 연계한 협진 시스템을 구축하면 의료 전달 체계 확립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정용철 의료/SW 전문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