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그얼롱, 확정 수익 배분 등 투자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각종 독소조항 삽입으로 기술력 있는 스타트업이 내년도 대거 유탄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벤처투자업계 오랜 관행으로 치부하기에는 상황이 심각하다.
국내 벤처캐피털(VC) 상당수는 자기자본 투자가 아닌 연기금 등 주요 출자자 자금을 위탁 운용하고 있다. 초기기업에 투자 위험을 줄이고 출자자에 자금 배분을 위해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각종 조항을 집어넣어 안전장치를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모험자본 육성이라는 정부 취지와는 상반된다.
논란이 되고 있는 동반매각요청권과 함께 대표 불공정 계약으로 손꼽히는 사례는 또 있다.
상환전환우선주(RCPS) 투자다. RCPS투자는 일부 투자자에 의해 `연대보증`으로 악용된다.
RCPS란 투자자가 만기 때 채권처럼 상환을 받거나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가 붙은 우선주를 말한다. RCPS는 투자기업에서 수익이 났을 때 투자자가 투자기업 수익을 청구할 수 있다.
문제는 투자자가 세부조항을 삽입해 원금회수 수단으로 악용할 때다. 스타트업 사업실패로 투자원금을 회수할 수 없을 때, 투자자가 계약위반이나 조기상환 콜옵션 등 세부사항을 활용해 기업가를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부 스타트업은 사업실패 후 투자받은 자금을 의무상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제조업 스타트업을 창업했던 A씨는 모 VC로부터 수십억원 규모 투자금을 유치했다가 낭패를 봤다. RCPS 조항이 문제가 됐다. 계약위반을 이유로 투자자가 원금을 회수하겠다고 위협했던 것이다. 투자를 유치한 이후 A씨 스타트업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으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A씨는 “담당자가 투자원금을 갚으라며 수년 간 압박했다”면서 “법인카드 내역을 검사해서 횡령죄, 배임죄 등으로 집어넣을 수 있다고 위협했다”고 밝혔다. 부당지출을 근거로 계약이 파기되면 투자자가 투자원금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A씨는 여전히 투자금을 상환하고 있다.
창업 4년차에 접어든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B사 관계자는 “사업에 실패하면 투자원금을 대표이사가 의무 상환한다는 계약서를 받은 적이 있지만 바로 거절했다”면서 “투자금이 시급한 스타트업은 스스로에게 독소조항이 될 수 있는 계약을 수락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벤처캐피탈협회는 2013년 표준투자계약서 가이드라인을 도입했다. 창업자 연대보증을 폐지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하지만 가이드라인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RCPS가 사실상 창업자 연대보증 우회로로 쓰이고 있어서다.
업계에서는 거래 당사자가 합의를 토대로 발동하는 조항인 만큼 위법성은 없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계약 세부조항에 따라 투자자 원금회수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에는 공감했다.
익명을 요구한 개인 투자자는 “RCPS 계약 자체보다는 주식청구권 등 세부사항을 이용해 원금회수 수단으로 변질된다”고 설명했다.
RCPS를 악용하는 업계 관행을 근절하는 한편, 스타트업도 투자계약 시 독소조항을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종훈 국민대학교 글로벌창업벤처대학원 교수는 “엔젤투자자, VC 중 일부 `사이비 투자자`들이 지나치게 쉬운 조건으로 스타트업을 유인한 뒤 채무상환을 압박한다”면서 “스타트업도 투자자 평판도 등 사전 조사를 거쳐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영호기자 youngtige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