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도·기술적 한계가 뚜렷했던 의료정보 공유 패러다임이 전환기를 맞는다. 물리적 통합을 전제했던 기존 틀에서 벗어나 표준화된 데이터에 기반해 기업이 원하는 결과 값만 분석해주는 `무소유` 방법론이 등장했다. 연구 환경은 물론 헬스케어 시장에서도 거대한 변화가 예상된다.
17일 아주대학교병원 등에 따르면 국내 10여개 병원은 의료정보 관련 국제 컨소시엄 오딧세이에 참여해 공통데이터모델(CDM) 적용 작업을 진행 중이다. 아주대병원, 가천대길병원 등 일부 병원은 데이터 표준화 작업을 마쳤으며 삼성서울병원, 원주세브란스병원, 강원대병원 등 5개 병원도 올해 안에 마무리한다.
CDM은 데이터 구조와 의미를 동일하게 모델링한 양식이다. 마치 여러 문서양식을 엑셀 혹은 워드 파일로 통일해 단일 프로그램에서 작업하게 만든 것과 같다.
이 개념을 처음 제시한 곳은 오딧세이 컨소시엄이다. 세계 각국 병원이 보유한 임상정보를 CDM으로 통일하고 연구자, 기업 등에 공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구글, IBM 등 헬스케어 시장을 노리는 글로벌 IT기업도 적극 참여한다.
데이터 공유를 위해서는 물리적 통합을 이뤄야 한다는 기존 틀을 깼다. 기업은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분석 도구만 제공한다. 컨소시엄은 가입된 여러 병원에 분석 툴을 주고 병원은 데이터를 적용해 결과 값을 취합해 전달한다. 데이터 통합에 따른 제도적, 기술적 문제는 물론 보안 우려까지 해소한다. 12개국 53개 데이터베이스(DB)로부터 6억6000만명 임상정보가 CDM으로 변환했으며 데이터 공유를 위한 플랫폼도 76개나 개발됐다.
2015년부터 국내 병원도 오딧세이 컨소시엄에 가입해 활동을 시작했다. 아주대병원을 주축으로 가천대병원, 삼성서울병원, 강원대병원, 원주세브란스병원, 원광대병원, 전북대병원이 멤버다. 서울대병원과 강동성심병원, 국민건강보험공단 등도 올해 가입할 예정이거나 이미 프로젝트를 공동 수행 중이다.

국내 7개 병원 목표는 올해 안에 CDM 적용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동시에 외부에서 필요한 데이터 수요를 파악하고 결과 값을 제공하는 플랫폼도 개발한다. 예정대로 진행되면 국내에서 처음으로 복수 의료기관이 참여하는 의료정보 공유 생태계가 구축된다.
박래웅 아주대병원 의료정보학과 교수는 “최근 의료계 화두인 인공지능(AI)도 데이터가 핵심인데, 우리나라에서는 표준화가 거의 되지 않아 알고리즘은 많지만 돌릴 수 있는 데이터가 부족한 현실”이라며 “국내 10여개 병원이 참여하는 오딧세이 컨소시엄 활동으로 데이터 표준화를 통한 공유시대가 가시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안에 국내 병원 CDM 작업이 마무리되면 약 2000만명 데이터가 표준화된다. 이미 아주대병원은 22년간 축적한 230만명 임상정보를 CDM으로 변환, 요약 자료를 전 세계에 공개한다.
공유 생태계가 구축되면 연구 환경에 혁신적 변화가 예상된다. 그동안 국내에서 진행된 의학연구과제는 정보교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대부분 연구대상이 수백 명에 불과했다. 모수가 적어 신뢰성과 효용성이 떨어진다. 표준화된 2000만명 데이터가 구축되면 의학적 지식 발견 속도와 신뢰성을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다. 실제 아주대병원은 가천대길병원, 국민건강보험공단을 포함해 네덜란드 에라스무스대학과 CDM 변환 데이터를 기반으로 AI 기술 연구에 착수했다.
데이터를 한 곳에 보관하거나 원본 데이터를 외부에 공유하는 개념이 아니다보니 기존 개인정보보호법 등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보안 우려도 해소돼 의료정보 활용을 확산한다. 오딧세이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각국 의료기관과 비교해 국내 병원이 보유한 데이터 순도도 높다. 해외 의료기관은 대부분 보험청구 자료에 기반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3차의료기관 실시간 전자의무기록(EMR)이 핵심이다.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 품목이 다양하고 상세해 발전 가능성이 높다.
박 교수는 “오딧세이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국내병원은 대부분 3차 의료기관인데다 초 단위 변화요인과 검사결과 값까지 제공하는 데이터에 기반해 세계 각국에서도 높게 평가한다”면서 “우리나라의 발전된 ICT 역량을 적용해 의료정보 공유, 활용분야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 것”이라고 말했다.
정용철 의료/SW 전문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