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계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전국을 돌며 나누는 `과학정책 대화(Science Policy Dialogue)`가 세인의 주목을 끌고 있다. 우선 과학기술계가 민의를 표방하는 방식이 새롭기 때문이다. 민의를 전하는 방식으로 요즘 압도하는 것은 촛불시위와 태극기 집회 같은 데모다. 데모는 `민의를 가시화하는 미디어`다. 사람들 분노가 눈앞에서 가시화됐을 때 처음으로 정치인과 정책결정자들은 영향을 받는다. 그들에게는 데모가 거대한 압력 단체이며, 무서운 미디어다.
이에 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조용한 다수, 즉 무당파의 민의는 여론조사 숫자로만 전해진다. 영향력은 데모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기록으로 남는 영속 가치가 있다.
데모와 여론조사가 민의를 대표하는 표출 수단이지만 간격은 무척 크다. 대화 방식은 이 둘 사이를 채워 주고 보완하는 좋은 미디어라 할 수 있다.
`과학기술계 합리적 질서 논한다`는 타이틀을 달고 펼치는 과학정책 대화는 정치 전환기나 경제 불황기에 어김없이 나오는 `과학기술계 이지메(집단 폭력)`에 대해 과학기술계가 처음 시도하는 민의 표출 방식이다.
`정부 부처를 없애야 한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을 통폐합하자` `연구개발 관리가 엉망이다` `예산을 대폭 깎자`는 등의 강성 언어가 언제부턴가 과학기술계 언저리에 큰 돌덩이처럼 자리 잡고 있다. 미국 도널드 트럼트 신정부 출범에 맞춰 미국 과학기술계가 펼치는 여러 형태의 민의 표출 방식은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크다.
우리나라의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에 해당하는 미국 과학진흥협회(AAAS)는 대통령 취임식 직후 “트럼프 행정부는 대통령 과학기술 보좌관의 도움을 받아 모든 정책 입안에 과학 증거를 사용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과학 전문 지식으로 행정부 관리들이 위기에 대처하고, 특히 트럼프 정부가 기후변화에서부터 인프라 개발에 이르기까지의 당면 과제들을 대처해 나갈 때 과학 증거와 사실 규명에 근거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AAAS는 과기계의 입장을 온라인으로 알리는 `취임 100일째(First 100 Days)`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앞서 AAAS는 지난해 11월 다른 28개 과학 단체 및 교육 단체들과 함께 “이코노미스트들은 지난 50년 동안 미국 경제 성장의 절반 정도가 과학, 기술, 이노베이션의 진보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입증했다”며 대통령 과학기술 보좌관 임명을 제안했다.
미국 유수 대학과 매스컴들도 `과학자들은 자기 입장을 지키자` `트럼프 정부는 사실(facts)에 따라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내고 있다.
미국 171개 과학 관련 단체는 1월 31일 대통령 앞으로 “미국은 지금까지 개방성, 투명성과 아이디어의 자유 교류라는 원칙으로 세계로부터 가장 우수한 인재들을 끌어와 미국 과학의 우위와 번영을 성취했다”면서 “입국 금지나 비자 불허 조치를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그런가 하면 일부 과학자들은 백악관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편 AAAS는 오는 16~20일 보스턴에서 `과학에 의한 정책 수립 방법론`을 주제로 연차총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미국 과학기술계는 트럼프 정부의 과학 홀대 가능성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과학자들은 항상 `사회를 위한 과학`이라는 신념이 확고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다.
한국도 이제 과학의 힘이 대열을 이루는 시대가 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곽재원 전 경기과학기술진흥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