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의 Now & Future]<17>새 대통령의 절제된 40일

[곽재원의 Now & Future]<17>새 대통령의 절제된 40일

5월 10일. 대한민국 정권사에 유례없는 첫 기록들이 등재되는 날이다. 전 대통령이 구속된 가운데 대통령 선거가 치뤄지고, 대통령 당선자는 당선된 다음날부터 취임식 없이 대통령 공식 집무에 들어간다. 게다가 전 정권의 대통령 비서실 정무직, 국무총리, 국무위원들이 그대로 포진한 동거정부 형태다.

새 대통령은 승리의 환호를 뒤로 한 채 정면으로 산사태를 만나게 된다. 작년 10월 국정농단 사태 이후 밀린 숙제와 현안들이다. 보통은 대통령 당선 후 취임까지 67일, 취임 후 30일을 합쳐 97일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가동됐는데 이번엔 위원회 없이 가거나 운영해도 30일 밖에 안 된다.

곧바로 비교하기엔 무리지만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경우, 2016년 11월 8일 대선부터 올해 1월 20일 취임식까지 준비기간이 있었다. 100일의 허니문 기간도 있었다.

100일 개념은 대공황 가운데 당선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 대통령의 '취임 후 100일간'에서 나왔다. 그는 '행동, 그것도 즉시 행동'을 약속하고 여세를 몰아 불황대책을 잇따라 발표했다. 의회에 보내진 법안은 매일같이 가결됐다. 의회는 이 100일간에 가결 법률 수 신기록을 세웠다.

우리도 행정학자들 사이에서 60일 계획, 100일 계획이 제안되고 있다. 대통령 비서실 구성, 주요 정무직 인선 등 인사 출발점부터 새 대통령과 정부의 모습이 안정적으로 드러날 때까지 기간을 감안한 계산이다. 새 정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사다. 국무총리와 대통령 비서실장의 인선은 그 핵심이다.

그러나 국민은 새 대통령이 앞으로 할 '개혁 포인트'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자신들의 삶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새 정부는 과거 정부와 달리 촛불 민심과 태극기 민심을 아우르는 공정, 혁신, 신뢰, 소통, 공감, 상생, 통합 등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국정비전에 담아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과거 루즈벨트는 첫 100일 계획을 선언하며 대불황을 극복할 4개 핵심비전을 밝혔다. “모든 미국인들이 일터로 돌아오게 하고, 국민 저축을 보호하며 번영을 창출하고, 병든 사람과 노인을 지켜주며, 공업과 농업을 제자리로 돌려놓겠다”고 그는 역설했다. 같은 시기에 국가 총통에 오른 독일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서 가혹한 전후 보상과 불황에 시달렸다. 무능 국가를 한탄하는 국민의 낙담을 유럽국가에 대한 분노로 바꾸었다. 그는 독재자가 됐고 독일은 더 큰 전쟁을 일으키며 또다시 패전국이 됐다. 히틀러와 루즈벨트 임기가 겹친 12년 동안에 벌어진 비전 없는 분노국가 독일과 비전 있는 인본국가 미국의 모습이다.

우리와 비슷한 정치관행과 경제구조를 가진 일본의 경우 2001년 4월부터 5년 5개월간 정권을 유지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리더십을 예로 들 수 있다. 3개월 단기 정부란 비아냥 속에 출범한 고이즈미 정권은 선명한 구조개혁 의지 표방과 함께 정치, 관료 등 저항세력과 전쟁을 선언하며 첫 걸음을 내딛었다.

전임 총리가 만든 경제재정자문회의라는 최고 정책결정기구를 강화했다. 다케나카를 경제재정정책담당 장관직을 맡겨 구조개혁에 올인토록 힘을 실어줬다. 지금도 회자되는 고이즈미 기적의 시작이다.

관료주체의 정책 프로세스를 총리주도로 바꾸었고, 당정관계를 공고히 하여 4번에 걸친 총선을 모두 대승으로 이끌었다. 일본 최고의 내각 지지율과 세 번째 장기 정권을 기록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부실채권문제 조기 처리, 작은 정부를 지향한 규제완화 등 구조개혁을 통한 경제 활성화와 재정건전화를 양립시켜야 한다는 소신을 지켰다. 그 시금석으로 우정민영화를 추진했다. 정치계와 관료들 저항에 부닥치자 그는 국회를 해산하고 총선에서 승리해 개혁의 모멘텀을 크게 키웠다.

우리는 시간을 갖고 계획을 짜는 미국과 정권 출범 즉시 내각을 출범할 수 있는 일본과는 다르다. 그러나 성공한 지도자와 정권은 시간이 문제가 아니다. 개혁 의지와 국민을 설득하는 힘이다. 경제재생과 사회회복의 총사령관은 대통령이다. 수많은 과제를 일거에 처리하겠다는 의욕을 떨치고 이 두 개 과제를 껴안는 몇 가지 핵심정책으로 민심을 파고드는 절제된 행동이 필요하다. 40일이면 족하다.

곽재원 서울대 공대 객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