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잎에서 일어나는 광합성 작용을 그대로 모사한 인공광합성 장치를 만들 수 있다면? 햇빛,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 물만 갖고 유기물을 인공적으로 합성하거나 에너지를 얻을 수 있으므로 식량이나 에너지 분야에 일대 혁명을 몰고 올 것이다. 허무맹랑한 얘기 같지만 2011년 미국과학재단(NSF)의 '탐색적 연구를 위한 초기지원사업(EAGER)'에 선정된 연구주제 가운데 하나다. 미국 드렉슬대 연구팀은 1억원 연구비를 활용해 3D 프린터로 찍어낸 키토산 다공성 막, 광화학반응을 통해 생성된 물질이 투과되는 막, 광화학 기판 등을 쌓은 인공광합성 보드를 개발했다. 아직 인공광합성 장치를 개발하기까지는 멀어 보이지만 NSF가 지원한 이유는 이 연구가 '변혁적 연구'에 해당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변혁적 연구란 우리의 지식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킬 잠재력을 지니거나 과학·공학 분야의 새로운 패러다임 또는 분야를 창출할 만한 아이디어가 주도하는 연구를 말한다. 현재 지식의 경계를 넘나들기 때문에 도전적이고 실패 가능성이 높지만 성공한다면 타 분야에 미치는 파급력과 경제적 효과가 막대하다.
미국의 대표적인 기초연구 지원기관인 NSF는 미 연방 정부의 전체 연구개발(R&D) 예산 중 약 15%를 기초연구에 투자하고 있다. 약 10년 전부터는 기초연구의 핵심으로 변혁적 연구를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NSF는 근육 역할을 하는 액추에이터와 소형센서를 내장한 스마트 의복 연구를 지원했다. 뇌손상을 입은 사람에게 적용해 재활의료 분야에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전망되는 연구다. 또 탄소나노튜브에 열을 가해 전류를 생성하는 신개념의 초소형 발전기 연구도 지원했다. 이는 인체에 삽입하거나 대기 중에 뿌릴 수 있는 초소형 전자기기와 같은 새로운 기술 영역을 개척할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 국방부 산하의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에서도 변혁적 연구를 수행해 왔다. DARPA는 스텔스전투기, M16소총, GPS, 레이저처럼 군사무기와 관련된 기술을 개발했지만 이들 기술은 인터넷, 내비게이션, 음성인식기술, 원격수술로봇, 무인자동차, 3D 프린터처럼 산업적 파급효과가 큰 기술의 개발과 상용화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DARPA가 개최한 무인자동차대회에서 2005년과 2007년 우승팀을 이끌었던 스탠퍼드대 세바스찬 스런(Sebastian Thrun) 교수가 2011년 구글로 옮겨 구글 무인자동차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출범시키기도 했다.
DARPA는 외부의 간섭과 관료주의적 개입을 최소화한 미국 과학기술계의 특공대 같은 조직이다. 조직의 설립 목적 자체가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기술 개발이라 DARPA는 뚜렷한 필요가 있지만 과학기술계의 일반적인 기술로드맵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술을 신속하게 개발하기 위한 기초연구에 집중한다. 프로젝트가 기획되면 산학연을 가리지 않고 최고의 인재를 프로젝트 매니저로 고용해 3~5년 내에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연구의 전권을 부여한다. 또한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프로젝트의 경우 개발 성과를 기업에 라이센싱해 기술이 사회에 환원되도록 한다.
미국의 기초과학에 대한 정책은 1945년 과학연구개발국을 총괄했던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가 펴낸 '과학 끝없는 미개척지(Science the Endless Frontier)'란 보고서에 근거한다. 여기서 그는 연구자의 끝없는 호기심과 기초과학에 대한 자율적 탐구가 응용과 개발연구로 이어지는 과학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성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기초과학에 대한 정부 공공투자의 정당성을 두고 논란이 지속됐다.
1980년대 이후에는 과학자의 호기심을 토대로 한 기초연구와 응용-개발 연구 사이의 분명치 않은 연결고리를 강조하는 대신에 기초연구가 새로운 지식과 산업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토대로서 혁신생태계(innovation ecosystem) 전체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 결과 2006년에 발표된 미국경쟁력강화계획(American Competitiveness Initiative)에서는 10년간 기초연구예산을 2배로 증액하는 동시에 대학과 산업체 간의 협력연구를 강화해 사회에 대한 기초연구성과의 기여도를 강조했다.
그 뒤 오바마 정부는 기초연구성과의 사업화를 주요 국정 어젠다로 설정했다. 이른바 '실험실에서 시장으로(Lab to Market)' 슬로건을 내세우며 실험실에 머물러 있는 기초연구성과들을 빠르게 시장으로 이전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하는 사업화정책을 내세운 것이다. 특히 2000년대 중반부터는 변혁적 연구가 NSF와 DARPA뿐만 아니라 국립보건원(NIH)과 에너지부(DOE)처럼 연구개발을 수행하는 정부부처 전반에 걸쳐 강조되기 시작했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내놓은 2018년도 예산안에서 국방 및 안보 관련 예산이 크게 증가한 반면 환경과 과학기술 예산이 큰 폭으로 줄어 과학자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현 집권당인 공화당은 민주당에 비해 민간의 기술혁신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보다 시장 개입을 최소화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전문가들은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보다는 응용과 개발, 시장 직접 지원 등에 대해 조정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수년간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 비율 세계 1위를 지켜왔던 우리나라도 최근 조사에서 4.23%로 세계 2위(2015년 기준)를 기록하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부의 R&D 투자 증가율은 2013년 7.0%에서 1.9%로 떨어졌고 민간 투자 증가율도 2011년 16.4%에서 2015년 2.6% 낮아지면서 국내 R&D 투자 확대가 한계에 직면했다는 분석이다.
내년은 정부가 향후 5년 간 대한민국 기초과학의 방향을 결정하는 '4차 기초연구진흥종합계획(2018~2022년)'을 새로 수립해야 하는 시기다. 이제 R&D 투자를 확대하기보다는 부처 협업을 효율화하고 사업성과를 높이기 위한 노력에 경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국가 차원에서 기초연구 지원사업의 목표와 비전에 대한 논의가 재점화될 조짐이다. 특히 변혁적 연구는 우리나라가 추격형에서 선도형으로 국가혁신체제를 전환하고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특히 강조돼야 하는 부분이다. 기초연구의 필요성과 공공투자의 정당성을 국가사회의 문제 해결과 어떻게 연결할지에 대한 공론의 장이 활발하게 열리길 기대한다.
글: 안형준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 일러스트: 이명헌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