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또 한번 특허권자 보호 범위를 좁히는 판결이 나왔다.
미 연방대법원은 최근 '제한요건'과 '지역'을 한정해 특허품을 판매해도 특허권으로 구매자의 제품 처분까지 막을 수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제한요건' 등에 따라 특허권 행사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지난해 연방항소법원 결정을 뒤집은 결정이다. 대법원은 제품 재판매를 금지한 계약을 어기면 계약법에 근거해 다툴 수 있지만 특허 침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뉴욕타임스는 앞으로 특허품 재가공·재판매가 쉬워질 것이라며 환영했다.

◇“특허로 특허품 재판매 못 막아”
최근 블룸버그 등 외신은 지난달 30일(이하 현지시간) 미 대법원이 판매가 이미 끝난 특허품 재판매를 특허로 막을 수 없고(8-0), 이러한 원리(특허소진론)는 해외에 판매한 제품에도 동일하게 적용한다(7-1)는 판결을 내렸다고 전했다. 미 프린터 제조사 렉스마크가 국내외에 판매한 일반형·할인형 토너 카트리지를 리셀러 업체인 임프레션 등이 재가공해 미국으로 수입하자 특허 침해라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은 특허권자의 배타적 배포권은 제품 판매 후 없어진다는 '특허소진론'이 특허품 최초 판매 당시 계약과 무관하게 적용된다고 판단했다. 특허소진론은 특허품 판매로 이미 수익을 올린 권리자에게 이후 유통 과정에서도 특허권 행사를 허용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이중 보상·유통 방해 등을 방지하는데 활용하는 원칙이다.
피고인 임프레션을 중고차업체에 비유했던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판매가 완료된 특허품에 더 이상 특허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원칙은 구매자가 재판매를 하지 않기로 합의한 경우에도 유효하다”면서 “특허소진론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밝혔다. 소수 의견을 낸 루즈 베이저 긴즈버그 판사는 “해외 판매품은 특허가 소진되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주요 프린터 업체 새 전략 필요”
이번 판결로 렉스마크와 휴렛팩커드(HP), 캐논 등은 새 전략이 필요할 전망이다. 저가 프린터 판매 후 교체용 카트리지로 수익을 올리던 업체로서는 향후 전개될 환경에 적응할 방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등은 업계 전문가를 인용해 이들 업체가 현재 수익을 유지하려면 제품 가격을 인상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리셀러 업체가 원제조사 로고를 그대로 부착해 판매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브랜도 신뢰도 저하 역시 고려사항이다. 리셀러 업체는 수혜가 예상된다.
뉴욕타임스는 2일 사설에서 특허권으로 특허품 재판매를 막을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시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봤다. 앞으로 소비자와 기업이 제품을 개량해서 재판매하는 것이 쉬워질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동시에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법원을 피고 법인 소재지로 제한한 지난달 22일 대법원 판결 역시 소송 남용을 줄이고 혁신에 도움이 될 것으로 평가했다.
◇“계약법상 책임은 별론”
물론 이번 판결로 계약법상 책임까지 비껴갈 수는 없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특허권자가 요구한 제한조건을 특허 침해 소송으로 강제할 수 없지만 계약법상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특허품과 관련된 계약 불이행을 둘러싼 잘잘못은 특허 소송이 아닌 다른 민사 소송에서 다툴 수 있다는 말이다.
현승엽 변호사(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는 “프린터 업체가 앞으로 '재가공·재판매 금지' 전략을 특허 소송이 아니라 계약법을 근거로 이행을 요구할 수 있다”면서 “이번 판결로 프린터 업체가 전략을 전면 수정할 것인지는 섣불리 전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글로벌 차원의 재화·서비스 유통이 확대되고 있어 특허소진론 세부 내용을 한국의 법·제도가 수용할 수 있는지 연구해야 한다”면서 “(연구가 활발해지면) 한국 업체도 유사 분쟁에서 적합한 절차를 택하고 올바른 주장을 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용어설명
◇특허소진론: 특허권자의 배타적 배포권은 제품 판매 후 없어진다는 특허법 이론이다. 특허소진론에 따르면 구매자가 특허품을 처분할 때 권리자는 특허권을 행사할 수 없다. 특허품 판매로 이미 수익을 올린 특허권자가 이후 유통 과정에서도 특허를 행사하면 보상을 이중으로 받고 유통을 방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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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종 IP노믹스 기자 gjgj@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