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적법하게 판매가 이뤄진 특허 제품에 대해 특허권자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Yes”라면 해당 제품을 구입한 당사자나 유통업자 등은 자신이 정당한 대가를 지급했음에도 계속하여 특허권자 간섭을 받을 수 있는 현실에 분개할 수 있다. 반대로 대답이 절대적으로 “No”라면 최초 판매자 또는 특허권자는 제품 재가공〃재판매 시장이 새로운 제품의 개발 및 판매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할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합리적인 대답을 찾으려면 먼저 '특허권 소진 원칙'을 살펴봐야 한다. 특허권 소진 원칙은 최초 판매의 원칙이라고도 하며, 적법하게 만든 특허품이 일단 판매된 이후에는 해당 매수자 등 권리취득자가 자신이 취득한 특허품을 재판매 또는 다른 방법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즉 특허권자의 배타적 배포권은 최초 판매를 통해 소진(상실)된다는 것이다. 특허권 소진 이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특허권자는 최초에 특허품을 판매해 수익화하는 행위를 통해 이미 경제적인 보상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최초 판매 후 유통단계에 놓인 제품까지 특허권이 적용된다고 하면 이미 경제적 보상을 받았던 특허권자가 이익을 중복으로 향유하는 결과가 되고, 이는 또한 유통의 자유를 보장하는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렉스마크 vs 임프레션 사건
2017년 5월 30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프린터 토너 카트리지 재가공〃재판매와 관련된 특허 침해 소송에 대한 판결을 내리면서 특허권 소진 원칙을 강하게 확인했다.
먼저 사건 경위를 살펴보기로 한다. 렉스마크는 프린터 및 부속장치를 생산해 판매하는 미국 기업으로 자사의 미국 특허품인 토너 카트리지를 정가 제품 및 1회용 할인 제품으로 분류해 미국 내 및 해외에서 판매해 왔다. 1회용 할인 제품은 고객이 '해당 제품을 한번만 사용하고, 렉스마크 이외의 제3자에게는 제품을 전달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은 계약서에 서명한 후 구매할 수 있었다. 기술적으로도 토너 사용 후 카트리지 재사용을 방지하는 마이크로칩이 설치돼 있었다.
임프레션은 재생 카트리지 생산〃판매 업체로, 소비자가 사용한 렉스마크의 토너 카트리지를 구매한 후 토너를 다시 채우는 방식으로 재생 카트리지를 생산해 판매했다. 이를 위해 1회용 할인 제품에 설치된 마이크로칩은 무력화했다. 렉스마크는 자사가 미국 내에서 판매한 정가 제품을 제외하고, 해외(미국 외)에서 판매한 정가 및 할인 제품과 미국 내에서 판매한 할인 제품을 재생한 카트리지에 대해 임프레션을 상대로 2010년에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지방법원 판결은 렉스마크가 해외에서 최초 판매한 정가 및 할인 제품의 재생 카트리지에 대해서만 특허침해를 인정했다. 양 당사자는 모두 연방순회항소법원(CAFC)에 항소했다.
렉스마크는 미국 내에서 판매한 할인 제품에 대해 고객과 계약을 통해 명시적으로 재사용 및 재판매를 금지하는 '제한사항'이 붙어 있었다는 이유로, 이들을 재생한 카트리지를 재포장 및 재판매한 것은 특허 침해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렉스마크가 해외에서 판매한 후 다시 임프레션이 미국 내로 수입한 모든 제품에 대해서는 자사가 수입할 수 있는 권한을 누구에게도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특허 침해를 주장했다. 임프레션은 렉스마크의 미국 내외에서의 최초 판매로 '특허권이 소진'되었으므로, 임프레션이 이를 자유롭게 재생 및 재판매할 수 있으며 해외에서 취득한 제품인 경우 수입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취지로 대응했다. 특히 '미국 외에서 적법하게 판매된 저작물을 미국으로 수입해 판매하는 것은 권리소진 이론에 따라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한 2013년 연방대법원 판결(Kirtsaeng v. John Wiley & Sons, Inc.)의 법리가 본 특허 침해 소송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2016년 2월 12일 연방순회항소법원은 항소심에서 렉스마크의 손을 들어 주었다.
연방순회항소법원은 특허권자 본인이 특허품 판매 시 재사용 및 재판매 금지와 같은 합법적인 제한사항을 부여한 경우 특허 침해 소송으로 이를 강제할 수 있다고 하면서 렉스마크가 미국 내에서 판매한 할인 제품의 재생 카트리지가 렉스마크 특허를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또한 연방순회항소법원은 특허권자가 해외에서 제품을 판매한 경우에는 해당 제품에 대한 특허권이 소진되지 않는다고 하여, 렉스마크가 미국 외에서 판매한 제품을 미국으로 재수입한 것 또한 특허 침해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덧붙여 2013년의 저작권 관련 판례는 저작권법 고유의 명문조항(17 U.S.C. §109(a))에 근거한 것으로서 특허 침해소송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했다.
◇미 연방대법원, 연방순회항소법원의 판단을 뒤집다
위 연방항소법원 판결에 대해 임프레션이 불복해 제기한 상고심에서 미 연방대법원은 2017년 5월 30일 특허권 소진은 제한사항이나 위치와 관련이 없다고 하면서, 연방항소법원 판단을 모두 배척하는 취지로 판결을 확정했다. 이번 연방대법원 판결은 특허권 소진 원칙을 강하게 지지했고 유통의 보호 또한 중요한 가치라는 점을 확인했다.
먼저 연방대법원은 특허권자 본인이 제한사항을 부여했을 경우 계약법 문제로 이를 적용하는 것은 별론으로 하되, 이를 특허 침해 소송을 통해 강제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에 따라 미국 내에서 렉스마크가 최초 판매한 할인용 제품은 이미 특허권이 소진됐고, 렉스마크는 임프레션을 상대로 특허 침해를 주장할 수 없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2008년의 이른바 '콴타 판결'(Quanta Computer, Inc. v. LG Electronics, Inc.)은 특허권자가 명시적인 또는 적법한 제한사항에 따라 물품이 판매된 경우에도 특허권자는 해당 제품에 대한 특허권을 더 이상 보유하지 않는다고 한 것으로, 이러한 판단은 본 판결의 취지와 일맥상통한다고 했다. 콴타 판결에서 미 연방대법원은 LG전자 특허의 정당한 실시권자인 인텔의 칩을 구입해 제품을 제조한 대만 PC제조업체의 행위는 특허권 소진 원칙이 적용돼 침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 바 있다.
또한 연방대법원은 미국 외 지역에서 판매된 제품의 경우에도 미국 내에서와 마찬가지로 특허권이 소진된다고 했다. 특허권의 소진과 저작권의 소진은 모두 보통법에 뿌리를 둔 것으로 강한 유사성이 있으므로 해외 판매에 특허권 소진을 적용하는 것 또한 저작권 소진을 적용하는 경우와 다를 바 없다고 했다.
프린터 생산〃판매업체가 프린터 본체 가격은 낮추되 카트리지 등 소모품 판매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전략을 써온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 연방대법원 판결을 통해 미국 등록 특허를 가지고 있는 프린터 업체의 사업 전략은 일부 수정될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다만 연방대법원이 재생 및 재사용 금지와 같은 제한사항은 침해 소송을 통해 강제할 수 없을 뿐, 해당 제한사항에 대한 계약법상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여 일정한 선을 그었다는 점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프린터 업체들의 “재생 및 재사용 금지” 전략이 이 판결을 계기로 일부 위축이 될 것으로 예상은 되지만 전면 폐지될 것인지 여부는 섣불리 장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특허권 등 지식재산권 소진 이론과 관련해 언급되는 사항이 병행수입 문제다. 권리 소진이 국내외에 상관없이 이뤄진다고 보면 병행수입 행위는 최종 수입국에서 원권리자의 지식재산권을 침해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반대로 권리 소진이 국내에서만 적용된다고 보면 원권리자가 병행수입 제품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을 갖는다. 따라서 이번 연방대법원 판결은 병행수입에 유리한 논리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해석은 유통의 자유를 보장하고자 한 판결 취지와도 일맥상통한다. 다만 권리 소진 및 병행수입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국가별로 이견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저작권의 경우에는 저작권법 제20조 단서 조항에 의해 권리 소진을 인정하고 있으나 특허는 특허법에 명문 조항은 없으며, 다만 하급심 판결에 특허권 소진 원칙을 원칙적으로 수용한 것들이 존재한다. 대법원의 경우 특허권이 소진됐다고 하더라도 이는 권리범위 확인심판이 아닌 특허권 침해 소송에서 항변으로 주장할 사항이라고 판시한 판결이 있다(대법원 2010. 12. 9. 선고 2010후289 판결). 재화 및 서비스 유통 채널의 글로벌화가 속도를 더해가는 현실을 감안할 때 특허권 소진 이론과 관련한 세부적인 법리들이 우리 법제에서 수용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연구가 좀 더 활발하게 이뤄질 필요가 있다. 이는 분쟁 당사자들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안정적으로 해결 절차를 선택하고 바른 주장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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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승엽 변호사(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 lawyer@goke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