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원자력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고리본부

[이슈분석]원자력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고리본부
고리 1호기 전경. 발전소 주변을 둘러싼 10M 높이의 해안방벽이 인상적이다.
고리 1호기 전경. 발전소 주변을 둘러싼 10M 높이의 해안방벽이 인상적이다.

부산시 기장군과 울산시 울주군에 걸쳐 자리 잡은 고리·새울 원전 본부는 우리나라 원자력 산업의 역사가 집약된 곳이다. 국내 최초 원전인 고리 1호기부터 UAE에 수출된 APR 1400 원자로가 들어선 신고리 3·4호기까지 우리 원전산업 성장의 산 증인이다. 그만큼 사회적 관심도 높았고, 원자력 찬반 논란에서 빠지지 않고 도마에 오른 곳이다. 19일 0시를 기준으로 고리 1호기가 영구정지하면서 고리본부는 원자력 발전을 넘어 후처리 산업이라는 새로운 미래의 문을 연다. 영구정지를 이틀 앞둔 지난 16일 고리본부 현장을 찾았다.

◇통일의 꿈 후배에게 물려주고 퇴역하는 고리 1호기

“원자력 발전에 의한 최초의 불이 켜지고 보람찬 역사를 창조하려는 겨레의 굳은 의지는 끝내 평화통일을 이룩하여 북녘 땅까지 환하게 불밝힐 것이다.”

고리 원전 본부 입구에 세워진 민족중흥의 횃불 탑.
고리 원전 본부 입구에 세워진 민족중흥의 횃불 탑.

故 박목월 시인이 고리 1호기 준공을 기념하기 위해 남긴 시다. 문구는 고리 1호기 입구에 있는 민족중흥(民族中興)의 횃불 기념탑에 새겨져 있다. 고리 1호기는 통일 이후 전기가 부족한 북녘 땅까지 원자력 전기를 보내고자 했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역사로 남게 됐다.

16일 기장군의 모습은 주말을 앞둔 예삿날과 다르지 않았다. 고리 1호기 영구정지를 놓고 찬반단체의 농성이 있을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청명할 날씨 때문이었는지 원전 주변 분위기는 오히려 더 평온했다. 고리 원전으로 향하는 해안도로 옆으로는 바다 속에서 무언가를 캐는 해녀와 방파제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뒤로 고리원전이 배경처럼 펼쳐졌다.

고리 원전 인근 해안 풍경. 방파제 끝으로 낚시꾼들이 보인다.
고리 원전 인근 해안 풍경. 방파제 끝으로 낚시꾼들이 보인다.

원전 주변 바다에서 낚시와 물질을 한다는 것은 원전과 멀리 떨어진 지역이나 도시인에게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다. 체르노빌,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을 겪으면서 많은 이들에게 '원전=방사선 피폭'이라는 공포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 반대편에는 방갈로와 카라반을 이용하고 해안카페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러 기장군을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

주민스포츠센터와 함께 있는 홍보관을 지나면 해안 방벽과 고리 원전 격납 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영화 '판도라'에서 내부 압력을 못 버티고 상부가 폭발한 건물이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지만, 고리원전 직원들은 아직도 기장군에 놀러오는 여행객 대부분이 “'저게 판도라냐'라고 묻는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민족중흥의 횃불로 불렸던 고리 1호는 이제 판도라란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린다.

원전을 만나려면 출입절차를 거쳐야 한다. 일반인이건, 한국수력원자력 직원이건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전신청과 함께 개인 신상을 미리 알려야, 방문 당일 출입증을 받을 수 있다. 두 곳의 게이트를 오가기 위해 출입증과 지문 확인이 반복된다. 노트북·휴대폰 디지털기기는 물론, 라이터 같은 위험물질도 가져갈 수 없다. 현장 작업자가 필요에 의해 소지하는 휴대폰에도 카메라 봉인과 함께 특수 보안앱을 설치한다.

◇40년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설비

보안문을 통과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후쿠시마 이후 높이를 해수면에서 10m까지 올린 해안 방벽이다. 족히 1~2m 두께는 돼 보이는 콘크리트 방벽이 고리 원전을 빙 둘러 보호한다. 고리 1호기로 가는 길은 거대한 철문(차폐문)이 지킨다. 해일이 몰려오면 철문이 닫히면서 바닷물로부터 완전히 밀폐된다. 유압방식으로 전원이 공급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작동이 가능하다.

고리 1호기 터빈과 발전기 모습.
고리 1호기 터빈과 발전기 모습.

10년 전 계속운전 결정과 일본 후쿠시마 사고 이후 재단장한 고리 1호기는 내외부 어느 곳에서도 낡은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주제어실(MCR) 건물 1층 출입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웅웅거리는 기계음과 수많은 은색 철제튜브와 펌프 설비 등과 마주한다. 기름때 하나 없이 깔끔한 기기와 반짝이는 우레탄 바닥이 시끄러운 기계음과 대비됐다.

고리 1호기 주제어실 모습.
고리 1호기 주제어실 모습.

터빈·발전기실을 지나 원전의 두뇌라 할 수 있는 MCR에 도착할 때까지 40년 된 낡은 발전소 이미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MCR 내부도 후쿠시마 원전 이후 천장과 조명구조 등 모든 내진 기준이 올라가면서 최신 설비로 바뀌었다. 원전 설비를 움직이는 제어반에 보이는 수많은 레버는 아직 아날로그의 향기를 풍겼지만, 많은 스위치와 계측기가 디지털화됐다.

MCR 상부에는 원자로 출력 99.1%, 발전기 출력 602㎿h라는 글자가 전광판에서 움직였다. 정지를 이틀 앞두고도 고리 1호기가 평소와 다름없이 전기를 생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표시다. 고리 1호기는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WH600 모델로, 공식 설비용량은 587㎿다. 퇴역을 앞 둔 설비답지 않게 99% 출력에서 공식용량보다 좋은 효율을 냈다.

고리 1호기가 2007년 계속운전 승인을 받은 후 10년 동안 가동이 정지된 것은 두 차례. 그만큼 운영관리와 유지보수가 철저했음을 보여준다.

노기경 한수원 고리원전본부장은 “고리 1호기는 지금도 부산시 가정 전기의 106%를 생산할 정도로 현역설비 수준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면서도 “고리 1호기가 원전 폐로라는 새로운 산업 가능성을 열어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노 본부장만의 마음은 아닐 것이다. 고리 1호기를 둘러보며 만난 근무자들 표정엔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아쉬움이 엿보였다.

이날도 고리 1호기는 19일 예정된 영구정지 기념식 단상이 만들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조용히 마지막 전기 생산 임무를 수행했다.

조정형 산업정책부(세종) 기자 jeni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