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펼칠 과학기술 정책의 속살을 볼 수 있는 연구개발(R&D) 예산의 윤곽이 드러났다. 정부가 지난주 총리 주재 국가과학기술심의회에서 내년에 14조5920억원을 주요 R&D 사업에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사업 예산은 올해보다 1.3% 느는 데 그쳤지만 내용을 보면 4차 산업혁명과 일자리 중시가 역력하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정책인 인공지능(AI), 자율주행기술 등 4차 산업혁명 분야 예산은 1조5230억원, R&D 기반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예산은 9320억원으로 올해보다 각각 25.6% 및 19.9% 늘어난다. 기초연구 예산도 15.6% 늘어난다. 증가율 두 자릿수의, 1조원 안팎의 굵직한 예산들이다.
주요 R&D 예산은 정부 과학기술 예산(올해 19조4615억원, 내년 19조7000억원 예상) 가운데 5년 이상 중장기 대형 R&D, 기초연구, 미래 성장 동력 창출 사업 등을 꼽은 것이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과학기술 예산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매년 두 자릿수 증가를 유지한다'는 불문율이 깨졌다. 최소한 정부 예산 증가율보다 높게 지켜 온 성역도 무너질 참이다.
정권마다의 과학기술에 대한 의지를 가늠할 때 가장 우선시해 온 지표는 과학기술 예산 증가율이었다. 예산 규모와 증가율이 동시에 팽창해 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정체기에 들어간 지금은 과학기술심의회에서 결정하는 주요 R&D 사업의 방향과 사업 과제를 더욱 중시하는 경향이다. 앞으로 이러한 경향은 추세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정책 입안자들은 바둑에 비유하면 과학기술 판짜기의 포석(방향)과 국면 운영의 행마(사업)를 조화롭게 아울러야 하기 때문에 한층 더 높은 전문성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를 맞고 있다.
여기에 최근 과학기술 정책 환경을 뒤흔드는 몇 가지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우선 4차 산업혁명이 몰고 오는 전 지구 차원의 기술 혁명과 사회 변화를 들 수 있다. 지금부터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은 사물인터넷(IoT), AI, 빅데이터, 로봇, 자율주행자동차, 3D 프린팅, 유전자 편집을 비롯한 바이오기술(BT) 등과 같은 4차 산업혁명을 받쳐 주는 첨단 기술 경쟁력을 파악하고 종전과 다른 돌파형 로드맵을 그려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로드맵을 실행하는 주체들에게 역할과 권한을 제대로 부여하는 일이다. 4차 산업혁명의 입구로 진입하는 것은 기술 혁신과 스타트업의 몫이다. 출구를 성공리에 빠져 나오는 것은 기업(벤처·중기·대기업),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대학의 몫이다. 출연연의 터널이 가장 깜깜한 곳에 위치한다.
정책은 입구를 든든하게 하면서 편안한 출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입구와 출구가 이음매 없이 이어질 때 4차 산업혁명의 과학기술 산업의 생태계가 완성된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정권 탄생과 함께 닥쳐온 신무역보호주의 및 신산업 정책의 파고도 과학기술 정책에서 큰 변수로 봐야 한다. 미국 정부는 다자간 무역 협정 파기,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한 파리협정 탈퇴를 비롯해 이제는 철강 무역도 국가 안보 차원에서 검증하고 있는 단계다. 그러면서 해외 기업의 미국 내 투자를 강권하고 있다. 한·미 정상회담에 대동한 국내 주요 그룹 기업들이 약속한 미국 투자 규모는 총 121억달러에 이른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렇듯 통상 정책에 몰두하는 것과 달리 과학기술은 등한시하는 모습이다. 과학기술 정책을 총괄하는 과학기술국의 국장을 아직도 임명하지 않은 채 정부 과학기술 예산마저 깎으려 하고 있다.
미국의 과학기술 정책은 이제 동부 중심에서 서부로 옮겨갈 전망이다. 미국은 전통으로 동부에선 매사추세츠공대(MIT)가 연방정부에 대해 과학기술에 관한 싱크탱크 역할을 해 왔다. 이와 비교해 서부에선 스탠퍼드대가 그 주변의 R&D 및 벤처 캐피털을 겸비한 창업형 연구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MIT는 정부, 스탠퍼드대는 시장과 각각 등식 관계에 있다. MIT가 '과학기술 정책'이라면 스탠퍼드대는 '과학·기술 혁신 전략'이다.
한국 기업의 대규모 대미 투자는 새로운 찬스를 포착할 수 있다. 약화를 우려하는 동부 과학기술계와의 접점을 확대할 수 있고, 입김이 강화되는 서부 산업기술계와의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 호기다. 차제에 동부가 유지해 온 도그마, 즉 기초연구·응용연구·개발연구를 나누고 정부 주도의 대규모 R&D 사업을 진행해 온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하는 새로운 미국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곽재원 서울대 공대 객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