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당신이 누군지 몰라요. 그런데 매일 밤 당신 꿈을 꿔요.”
루시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부터 어제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다. 그녀의 기억은 1년 전 10월 13일에 머물러 있다. 교통사고를 당한 후 매일 기억이 리셋되는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다.
가족은 혹시라도 루시가 상실감에 빠질 것을 우려해 모든 상황을 10월 13일에 맞춰 놓는다. 아침이면 10월 13일자 신문을 보여주고 저녁에는 어김없이 가족 생일파티를 연다. 창고에는 수백 장의 같은 신문을 쌓아 놓고 먹지 않은 케이크는 보관해 다음날 다시 촛불을 꽂는다.
헨리는 루시에게 사람의 감정을 느낀다. 루시가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 헨리는 그녀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매일 새로운 첫 데이트를 신청한다. 달콤한 첫 키스를 나눈 여인이 다음날이면 파렴치한으로 몰아가는 쓰라린 경험을 극복해 나간다.
'첫 키스만 50번째'는 헨리와 루시가 단기기억상실증이라는 질병을 극복하고 사랑을 이어가는 모습을 담은 영화다. 루시는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헨리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어버리지만 결국 느낌과 알 수 없는 감정이 두 사람을 잇는다. 누군지 몰라도 매일 밤 꿈에 나타나는 헨리, 머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꿈에서 본 남자의 느낌과 감정까지 모두 삭제되진 않았던 것이다.
기억, 느낌, 감정은 어떻게 다른 걸까. 느낌을 기억하고 감정을 느끼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는 걸까.
단기기억상실증은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뇌에서 저장된 기억을 복원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일본과 미국의 리켄 엠아이티 신경회로유전학센터 연구진은 조금 전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 실험쥐에게 인위적 자극을 가한 결과, 경험이 복원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실험쥐에게 특정한 상자에서 불쾌한 전기쇼크를 경험하게 한 후, 여러 개 상자를 놓고 반응을 살피는 방식으로 실험했다. 실험쥐는 전기쇼크를 당했던 상자 앞에서 얼어붙는 행동을 보였지만 다른 상자에서는 그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단기기억상실증이 기억을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저장된 기억을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결과다.
기억과 수면이 깊은 연관관계가 있다는 결과도 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생물화학과 연구진은 수면 부족이나 불면증 등 수면장애가 오래 지속되거나 수면제를 자주 복용하면 기억과 관련된 뇌 속 화학반응 시스템에 교란을 일으켜 기억력을 떨어뜨린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잠을 자지 못하고 깨어 있는 실험쥐에 시냅스 수용 단백질이 과다하게 발현, 학습 내용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지 못한 것이다.
루시와 헨리는 기억이 없어도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지만 실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좋은 기억과 추억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별 역시 함께했던 기억을 지우면 아픔도 지워질 거라는 게 일반적 생각이다. 하지만 잊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 콕콕 찌르는 것처럼 가슴이 애린 경험은 한 번 쯤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에 대한 기억을 반은 머리로, 반은 가슴으로 하고 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가슴에 채운 기억까진 지우지 못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최재필기자 jpcho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