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들어 거세진 '탈원전' 바람에 원자력계가 뒤숭숭하다. 고리 1호기가 가동을 멈췄고, 공사가 한창이던 신고리 5·6호기마저 건설이 일시 중단됐다. 국가 에너지 대계를 생각하면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과학계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원자력 연구개발(R&D) 위축이다. 원자력 R&D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탈원전을 위해서도 원전 해체·제염 기술 연구가 필수다. 남아 있는 원전 안전을 향상시키는 연구도 필요하다. 우주, 극지 탐사에도 원자력이 이용된다. 무분별한 R&D 축소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원자력 R&D는 직격탄을 맞았다. 약 10년간 연구한 소듐냉각고속로(SFR) 설계가 보류됐다. SFR는 사용후핵연료를 활용하는 차세대 원자로다. 고준위 핵폐기물을 최소화할 수 있고 효율도 높아 원자력계가 대안으로 연구해온 기술이다. 올해 말까지 1, 2차 계통의 특정설계를 마치고 내년 표준 설계에 들어가기로 했지만 보류됐다.
SFR처럼 원자력을 이용한 발전 분야 연구는 내년도 예산부터 대폭 삭감된다. 수출용 소형모듈형경수로(SMR)를 비롯한 다른 원자로 개발 프로젝트도 차질이 예상된다. 정부의 원자력 R&D 전략 자체가 원전 배제 방향으로 급선회했다.
정부는 차기 '미래 원자력 R&D 추진계획'에서 원자로 개발 대신 원전 해체 기술 확보, 원전 가동 안전 제고 등 목표를 마련했다. 원자력 R&D를 완전히 접는 게 아니라 방향을 바꾼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원자력 R&D 자체가 뒷전으로 밀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크다.
정부가 차기 원자력 R&D에서 집중할 분야는 원전 해체·제염이다. 가동을 멈춘 고리 1호기를 우리 손으로 해체해야 하지만 아직 필요한 기술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연구용 원자로 등 소규모, 저방사능 시설 해체 경험이 있지만 원자력발전소 수준의 대규모 시설 해체 경험은 없다. 해체 기술 확보가 가장 시급한 과제인 셈이다.
원자력연은 우리나라 해체 기술 수준을 선진국 대비 80%로 보고 있다. 해체 핵심기술 38가지 가운데 27가지는 확보했다. 나머지 11가지 기술을 2021년까지 확보하겠다는 목표다. 2021년은 고리1호기 해체를 본격화해야 하는 시점과 일치한다. 국내 첫 해체 원전에 국산 기술 적용이 목표다.
해체 기술 확보, 검증에 성공하면 세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 성장하는 시장에서 지위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된다. 1960~1980년대 건설한 원전은 계산상 2020년대부터 해체 수요가 발생한다. 2020년대 이후 수요가 지속 증가해 2030~2049년에는 185조원 규모의 해체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된다.
원전 안전을 둘러싼 연구도 소홀할 수 없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늘어날 전력수요를 감안하면 원전을 없애는 것은 현실상 불가능하다. 안전한 이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고예방, 방사성 물질 누출 배제 등 안전 연구는 현 정부에서 오히려 강화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우선 내년도 관련 예산으로 약 400억원이 편성됐다. 향후 과제를 지속 발굴해 R&D를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
원자력 융합 기술과 미래 에너지원 개발도 원자력 분야 과제다. 방사선은 암 치료와 질병 진단 수단으로 유용하다. 의료기기 자급, 진단기술 고도화는 그동안 취약한 분야여서 투자를 늦출 수가 없다. 원자력을 이용한 우주 동력원, 극지·심해에서 운용 가능한 전력 시스템 개발도 추진된다.
핵융합 기술은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주목받는다. 기존 핵분열 발전과 달리 폭발, 환경 오염 위험이 거의 없다. 기술 난도가 높아 우리나라를 포함한 7개국이 공동 연구를 하고 있다. 2040년대 핵융합 발전 상용화가 목표다. 장기 안목에서 추진되는 연구인 만큼 흔들림 없는 R&D와 국제 협력이 중요하다.
박홍준 한국연구재단 원자력단장은 “탈원전 시대라고 해서 원자력 기술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면서 “오히려 미래 에너지원 확보, 융합기술 개발 등 원자력 R&D 역할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송준영기자 songj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