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극의 빙하는 서서히 바다로 흘러들어 협곡을 이루고, 산과 바위를 깎아 내며, 해안절벽 피오르를 만들어 낸다. 트레킹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더 없는 풍경이다. 가장 길고 깊은 피오르는 노르웨이에 있다.
보이는 건 드문 관광객을 맞이하는 호수와 폭포, 그리고 여유롭게 떠다니는 유람선이 전부다. 그러나 보이지는 않는 곳에 세계 최대의 지하 벙커형 데이터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피오르의 평균 수온 8도 바닷물로 열 교환이 되고 자연 공조로 서버를 냉각하는 그린센터로도 유명하지만 핵폭탄과 전자폭탄(EMP) 등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도록 설계돼 있다.
우리나라는 지리 특성상 미사일 공격과 비무장지대, 해안 지역에서의 국지전 등 군사 도발 가능성이 매우 높다.
대량 인명 살상과 가공할 화력으로 초토화되는 핵미사일 공격도 대비해야 하지만 모든 전자기기와 데이터를 마비시키는 EMP 공격 방어 체계도 갖춰야 한다. EMP는 사람에게 직접 피해를 주지 않지만 군사 시설과 통신, 컴퓨터, 전자 장비를 무력화시킨다. 게다가 EMP는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순항미사일에 탑재하거나 항공기 투하로도 공격이 가능하다.
금융 정보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 금융 기관의 주전산센터(ITC)와 재해복구센터(DRC)는 수도권에 집중돼 있어 동일 재난 잠재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또 도심 지상 건물을 이용함에 따라 지진, 화재, 침수, 테러에 취약하다.
고도화된 해킹 기술과 끊임없는 사이버 공격도 방어해야 하지만 유일한 분단국이자 60년 넘게 휴전이 유지되는 국가에 걸맞은 금융 전산망 안보 체계와 금융 정보 방호 설비도 갖춰야 한다. 폭발물 사고, 태풍, 쓰나미(지진해일), 황사, 폭설, 지진, 홍수 등 일반 재난 위협과 디도스·APT·악성코드·랜섬웨어로부터 금융 데이터를 안전하게 보호해야 한다. 테러와 국지전, 미사일 포격과 EMP 공격으로부터의 방호도 필요하다.
EMP 공격을 원천 방어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방호 대책에 역점을 둬야 한다. 현재 방호 기술로는 전자파 차폐룸을 설치해서 대응하는 방안이 유일하다. 좀 더 실효성이 있고 안정된 방호를 위해서는 지하 벙커형이 적합하다.
처음 설계하고 건축하는 과정에서 모든 위협 잠재 요소를 고려해 신뢰성, 안정성, 방호성을 최우선으로 한다. 이러한 국가 공익 시설은 수익성, 현실성, 경제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진 않는다. 그 시설 자체가 상징하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2014년부터 2년 동안 추진돼 온 금융공동백업센터(제3백업센터) 구축은 금융정보화협의회에서 후보 부지와 구축 기관을 선정해 의결했다. 금융기관 태스크포스(TF)와 자문위원단 주축으로 지하 벙커형 데이터백업센터 구축 기본계획안을 마련했다. 국내 후보 부지 선정을 위한 컨설팅과 평가위원회를 통해 건축비용과 부지 선정도 확정했다.
2016년부터 이들 세 곳의 부지에 대한 우선협상과 운영비용 분담 방안을 시작으로 본격화가 예상됐지만 보류 상태다. 이해당사자 간 조율이 필요하다. 북한 미사일 도발 때마다 거론됐다가 다시 잠잠해지기를 반복한다.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는 기관이 나서야 한다.
컨설팅 수행 결과 서울에서 반경 100㎞ 이상 이격된 위치에서 폭우·가뭄·강수량·기온 등 자연 환경과 지진, 테러, 폭격 등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지역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 지역을 제외하거나 벙커형이 아닌 형태로 방향을 틀어선 안 된다. 현재 재해 복구 체계에서 대응할 수 없는, 좀 더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기반 시설 확보와 국민 재산권 보호를 위한 목적이 변질되지 않길 바란다.
답은 해외 사례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다. 해외에서는 보안성과 방호성이 뛰어난 지하 벙커형 데이터센터가 증가하고 있다. 기존 벙커 시설을 리모델링하거나 석회동굴, 탄광을 개조하는 등 공사비를 절감하면서도 인접한 자연 환경을 활용해 에너지 효율성을 향상시키고 있다. 금융 정보 백업 관리가 편리성과 접근성을 이유로 보안과 방호성을 멀리해서는 안 된다.
김정혁 진앤현시큐리티 전무 freesaf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