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전력·통신망을 마비시켜 대규모 혼란을 일으키는 전자기파(EMP) 공격이 현실 위협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는 국산 EMP 방호 제품 기피 현상이 여전하다. 방호 시설 외 기술 및 제품 시험·평가 기준과 인증 인프라가 부재할 뿐만 아니라 방호 시설 구축 사업도 전문성이 떨어진다. 국산 EMP 방호력 확보는 물론 국가 안보 강화를 저해하는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짧고 굵게 파괴력 강한 'EMP 공격'
EMP 공격은 핵탄두나 전용 전자기 폭탄(EMP탄) 투하로 강력한 전자파를 일으켜서 통신시설, 발전소 등의 전기 전자장비를 먹통으로 만드는 강력한 현대전 무기다. EMP 공격을 받으면 유무선 전화, 전력망, 금융시스템, 교통제어, 산업 시설 등 유효 반경 내 모든 인프라가 다 망가지면서 말 그대로 '암흑 상황'에 처한다.
EMP 무기는 영화와 게임에서 흥미를 배가시키는 주요 소재로 사용돼 왔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에서 테란 종족이 보유한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가 사이언스 베슬의 'EMP 쇼크'다. EMP 쇼크를 당한 상대 유닛과 각종 무기는 일시 먹통 상태에 빠진다.
영화 '매트릭스-에볼루션'에서 EMP는 기계 유닛의 인간 탐지와 대규모 공격을 일시나마 막아 내는 강력한 방어 무기로 등장했다.
EMP 공격의 파괴력이 강한 이유는 현대 산업 사회의 모든 전력과 통신이 기기, 시설물 등과 신경망처럼 정밀하고 복잡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인공지능(AI) 등 첨단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그 위험성은 추정조차 어려울 정도다.
무기용 EMP 연구는 1960년대에 시작됐다. 당시 10여개 국가에서 고공 폭발(고고도) 전자기 펄스(HEMP) 시뮬레이터를 개발하고, 이를 이용해 EMP 발생과 효과를 실험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전자기기에 미치는 HEMP 영향 연구가 본격화됐다. 최근에는 미국·유럽·러시아를 중심으로 레이더, 은닉물 탐지, 전자전 등에 적용 가능한 다양한 군사용 전자기파 무기가 개발되고 있다.
미군이 과거 이라크전에서 주요 시설에 HEMP 공격 실험을 감행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실제로 미군은 2010년 반경 6.8㎞ 이내에 피해를 줄 수 있는 HEMP탄을 개발했다.
EMP 방호 기술은 공격 무기처럼 미국 중심으로 유럽과 일본이 주도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국제특허를 받은 고전압 펄스 발생을 비롯한 EMP 공격 및 방호 관련 기술의 60% 이상은 미국이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EMP 기술은 국가 안보에 중요하지만 우리나라 EMP 기술 수준은 선진국과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 국내 EMP 방호 수준은 낙제점
EMP 업계와 학계는 EMP 공격 및 방호 기술이 쉽게 습득하기 어려운 첨단 방산 분야인 만큼 국산화를 서두르고, 지원도 집중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이 같은 요구와 거리가 멀다. 일례로 EMP 필터 전문 기업 I사는 최근 고출력 EMP 차단 필터를 개발했지만 판로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주 수요처인 공기관이 도입을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퍼런스(제품 공급 실적)와 성능 인증 여부가 문제다.
EMP 차단 필터는 제품 특성상 기존의 일반 제품 인증 절차 적용이 어렵다. EMP 방호 설비에 적용하기 위한 기준은 있지만 이를 시험·평가하고 인증해 주는 전문 기관은 없는 실정이다.
국내 통용 외산 제품은 대부분 제조사의 자체 시험 평가서로 인증서를 대체하고 있다. 반면에 국내 기업에는 별도의 객관화된 성능 검증을 요구한다. 역차별이다.
I사 대표는 “EMP 방호의 핵심 수요처는 국가 기간 시설로서 보안이 생명이고, 제품에 문제가 발생하면 즉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EMP 방호 제품을 국산화해서 적용하는 것이 바로 안보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MP 제품 성능을 전문으로 시험 평가할 수 있는 인프라와 기준도 없이 외산 제품을 오래 전부터 검증 없이 사용해 온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EMP 전문가들은 국산 EMP 기술 및 제품 경쟁력 강화를 위해 시험 평가 기준 마련과 관련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고, 관련 예산과 인력 투입 규모가 큰 만큼 정부 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정부 기관이 추진해 온 EMP 방호 구축 사업의 비전문성도 일찌감치 도마 위에 올랐다. 전문기업이 아닌 일반 건설사가 방호 시설 구축 사업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불거지고 있는 논란이다.
부실 논란에 휩싸인 과거 국방부의 대형 EMP 방호 시설 구축 사업은 비전문성과 이로 인해 나타나는 여러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낸 사례에 해당한다.
이 사업은 EMP 방호가 주목적이지만 전체로 보면 토목 건축 사업이라는 이유로 대형 건설사가 수주했다. 이 건설사는 EMP 방호 파트를 전문 중소기업에 하청을 주면서 경쟁을 붙여 당초 책정된 EMP 방호 구축 비용을 절반 이하로 줄였다.
중소 하청업체는 줄어든 비용에 맞춰 방호 설비를 구축했고, 기자재 사용을 비롯한 방호 성능의 부실 논란을 촉발하게 됐다.
한 EMP 방호 전문 기업 대표는 “EMP 방호 시설 구축은 전문 기업이 수행해야 방호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고, EMP 방호 산업의 경쟁력도 높일 수 있다”면서 “건축·토목 분야 비중이 높아 대형 건설사가 맡더라도 방호 분야를 분리 발주하거나 책정된 방호 예산을 그대로 집행하도록 하는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임동식기자 dsl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