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중요 에너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에너지위원회 '패싱' 논란이 커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탈원전 로드맵 발표까지 에너지위가 단 한 차례도 소집되지 않았다. 정부가 탈원전 강행을 위해 합당한 논의 절차까지 생략했다는 지적이다.
에너지 업계는 에너지위가 유명무실해지면서 정부에 민간 의견을 제안할 수 있는 창구가 막혔다고 우려했다.
31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정부는 신규 원전 백지화, 노후 원전 수명 연장 금지, 월성 1호기 조기 폐로와 관련해 별도의 에너지위를 소집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산업부 관계자는 “에너지위는 결의 기구가 아닌 자문 기구로, 정책 결정 권한은 없다”면서 “탈원전 정책과 월성 1호기 조기 폐지와 관련된 별도의 위원회 소집 계획은 있지 않다”고 밝혔다.
정부는 탈원전 정책이 올해 초 대통령 선거에서 공약 사항으로 국민의 선택을 받았고, 공론화 과정에서도 같은 여론을 확인한 만큼 추진 명분을 확보했다고 봤다. 탈원전과 관련해 별도로 에너지위 의견을 수렴할 필요성이 없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이달로 예정된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도 에너지위 소집 없이 전력정책심의회 협의로 확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원자력을 비롯한 에너지업계는 정부의 에너지위 배제에 우려를 표했다. 탈원전·탈석탄 등 국가 미래 에너지 대계를 그리는 과정에서 에너지위를 제외시키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다.
에너지위는 에너지법에 따라 정부가 주요 에너지 정책과 관련 계획을 심의하기 위해 설치·운영하는 기구다. 이에 앞서 문재인 대통령이 탈원전 공약을 제시했다 하더라도 실제 정책 수립 과정에서는 에너지위를 소집, 의견을 구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신고리 공론화를 앞두고 산업부가 한국수력원자력에 신고리 5·6호기 공사 일시 중단 요청 공문을 보낸 것도 논란거리다. 정유섭 자유한국당 의원은 국정감사 자료를 통해 정부법무공단이 에너지법 9조에 따라 산업부가 에너지위를 개최하고, 에너지위가 공사 중단을 권고할 수 있다는 조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산업부가 한수원에 공사 일시 중단을 권고하기 위해선 에너지위 개최 및 심의를 거쳐야 하지만 절차를 생략했다는 해석이다.
우리나라 첫 원전 영구 정지 사례인 고리 1호기도 에너지위 절차를 밟았다. 2015년 6월 산업부는 에너지위를 열어 고리 1호기 영구 정지를 한국수력원자력에 권고했다. 같은 달 한수원 이사회가 해당 권고안을 받아들여 관련 절차가 진행됐다. 이미 정부 차원의 고리 1호기 영구 정지 논의가 있었지만 최종 결론은 에너지위를 통했다.
에너지위는 그동안 국가 주요 에너지 정책 활동에서 민간 의견 제안 창구로 활용돼 왔다. 국가에너지기본계획 수립 때마다 소집됐다.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도 전력정책심의회와 함께 비중 있는 역할을 했다. 지난해 6월에는 해외 자원 개발 개선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이래 지금까지 1년 넘게 열리지 않았다. 앞으로 월성 1호기의 조기 폐로 일정 수립에서도 에너지위 소집 여부는 불투명하다.
일각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에너지위 개편 작업이 어그러지면서 소집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분석까지 나온다. 문재인 정부는 현 산업부 에너지위원회와 환경부 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이명박 정권 이전처럼 대통령 위원장 기구로 격상시킬 방침이었다. 대통령 위원장 기구가 늘어나는 부담 때문에 관련 작업은 답보 상태에 있다.
에너지위에 참여한 전문가는 “현 위원이 지난 정부 시절에 구성됐어도 탈원전 로드맵을 발표하기 이전에 위원회를 소집하는 형식 절차는 거쳐야 했다”면서 “정부의 탈원전 로드맵을 실제 계획에 반영하는 과정에서라도 위원회 의견을 수렴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조정형 산업정책부(세종) 기자 jeni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