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배터리업계가 대규모 증설 투자에 나섰다. 리튬이온 배터리 종주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대반격 행보로 풀이된다. 중국이 자본력과 세계 최대 시장을 무기로 빠르게 추격해 오는 가운데 일본 설비 확충까지 더해지면서 한국 배터리 산업이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할 우려가 커지고 있다.
5일 업계에 따르면 소니 전지사업부문을 인수한 무라타제작소는 증산을 위해 2019년까지 500억엔(약 5000억원) 규모의 설비 투자 계획을 잡았다. 중국과 싱가포르 공장 생산 능력을 보강, 현재 15% 수준인 모바일 배터리 시장 점유율을 20~30% 수준으로 확대한다는 목표다.
세계 최대 전기차 배터리 업체 파나소닉은 총 1000억엔(1조원)을 투입해 일본, 중국, 미국에서 동시 증설에 나선다. 내년 3월 말 가동을 앞둔 중국 다롄 공장에 제2공장을 추가로 세워 전기차 배터리 생산 능력을 두 배로 늘린다. 일본에 있는 액정표시장치(LCD) 공장에서도 2019년부터 전기차 배터리를 병행 생산한다. 테슬라와 공동으로 운영하는 미국 네바다주 공장도 1기 공장 건설과 생산 라인 증설을 동시에 벌인다.
일본 스마트폰용 리튬이온 배터리 업체 맥셀홀딩스(옛 히타치맥셀)는 약 10억엔(약 100억원)을 투입해 중국 장쑤성 우시 공장 셀 생산 라인을 증설한다고 일간공업신문이 보도했다. 일본 전자부품업체 TDK도 자회사 ATL의 생산 설비를 늘려 지난해보다 15% 증가한 생산 능력을 확보했다. 내년에는 연간 생산 능력을 올해 대비 약 15% 더 끌어올린다.
현재 배터리 대량 양산이 가능한 국가는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뿐이다. 중국이 가격 경쟁력을 내세운다면 일본은 품질로 승부한다. 일본은 1990년대 니켈수소전지, 니켈카드뮴전지 상용화에 성공했다. 1991년에는 소니가 리튬이온 배터리 상업화에 성공하면서 북미와 유럽을 제치고 배터리 산업 종주국으로 달려 나갔다.
이차전지 핵심 4대 소재 시장에서 일본은 최강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아사히카세이는 분리막 시장 1위 업체이며, 미쓰비시화학은 전해액 분야에서 경쟁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코발트계 양극재 시장에서는 니치아가 2위, 니켈계에서는 스미토모가 1위다. 음극재 시장은 인조흑연 분야에서 히타치화학, 일본카본 등 일본 기업이 압도하는 기술력을 자랑한다.
광산부터 완성차까지 수직 계열화하며 '배터리 굴기'에 나선 중국은 이미 한국에 위협 실체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은 전기차 산업 육성 정책을 펼치는 동시에 코발트, 리튬, 니켈 등 핵심광물을 싹쓸이하고 있다. 이에 비해 기술력이 뒤처진 소재 분야는 한국이나 일본 업체와의 합작 법인 설립으로 맹추격하고 있다. 인력 수급에도 팔을 걷어붙였다. 최근에는 국내의 한 대기업에서 상무급부터 실무연구원까지 핵심 연구 인력 20명이 중국 업체로 자리를 옮기는 등 이슈가 되기도 했다.
한국 배터리 산업 위기는 현실로 다가왔다. 한 이차전지업계 관계자는 “최근 하루에 한 번꼴로 헤드헌터로부터 중국 업체 취업을 알선하는 연락이 오고, 일본에서는 소니나 파나소닉 출신 개발자들이 새롭게 시장에 진출해 잠재된 경쟁자가 될 여지도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 완성차 업체도 한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직접 배터리를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면서 실제 내부에서 느끼는 위기감이 상당한 것이 사실”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현재 IT·모바일(IM)용 리튬이온 배터리 시장에서는 삼성SDI, 전기차용 리튬이온 배터리 시장에서는 파나소닉과 LG화학 등이 각각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특히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는 매달 2위 이하 순위가 바뀔 정도로 한·중·일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하다.
최근 급부상한 전기차용 중형 배터리 시장에서 지난해 기준으로 일본과 중국 업체가 1~3위를 석권했다. 앞으로 전기차 배터리 경쟁에서 밀리면 한국이 일본, 중국에 밀려 3위로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표1> 2016년 소형 리튬이온배터리 점유율 순위 (자료=SNE리서치)
<표2> 2016년 중대형 리튬이온배터리(승용차용) 점유율 순위(자료=SNE리서치)
정현정 배터리/부품 전문기자 iam@etnews.com